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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이후 40년, 전두환을 샤먼바위에 묶어둔다면(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5-15 11:38
조회
1679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때 세상은 고요했었다. 80년 오월 이후 참혹한 민주주의의 학살 현장을 고발했던 사람들은 등사원지 위에 철필이 닳도록 분노를 적었고 가리방 등사기에 롤러를 밀어 찌라시를 만들었으나 고요했다. 새벽이면 충무로 인쇄소 골목 어디쯤을 두리번거렸던 또 다른 사내들은 찌라시 뭉치를 허리춤에 걸고 다시 새벽 쪽으로 사라졌으나 고요했다. 이른바 거사가 있는 날엔 그랬다. 모든 것이 비밀이어야 했다. 속삭이는 대화나 데모일정을 잡기위한 공중전화기의 다이얼 소리마저 은밀해야 했다. 해가 중천으로 자리를 옮길 즈음 어느 대학가 건물 옥상위에서는 어느 청년이 구호를 외쳤고 찌라시가 뿌려졌고 몇몇의 학생들이 집회를 가졌으나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구호를 외쳤던 학생들은 상주하는 경찰들에 의해 그 순간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며 닭장차에 실려 갔고 몇 날 밤을 새워 누군가 써내려간 분노의 찌라시는 학교 직원들이 목숨을 걸 듯 수거해 갔다. 정의에 목마른 청춘이 꿈틀대던 대학에서는 간간이 벌어지는 풍경이었는데 그 시간은 10여분을 족히 넘지 못했다. 광주의 그날 이후 몇 년간 적어도 民主라는 말 앞에서 우리의 세상은 지나치게 고요했었다.


 80년대 중반엔 학교 직원들이 미쳐 수거해 가지 못했던 찌라시 한 장을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갔던 신입생이 있었다. 그가 본 가장 큰 글씨는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였고 그가 중얼거렸던 말은 “이 빨갱이 새끼들” 이었다. 찌라시를 만들고 옮기고 집회에서 구호를 외쳤던 청년들 중 몇몇은 감옥에 갔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찌라시를 뿌린 청년들 중 또 몇몇은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그 신입생은 나중에야 알았다. 신입생이 봐왔던 언론에서 그런류의 사실들은 뉴스거리로 취급받지도 못했다. 뉴스에는 주로 전두환 대통령이 민족의 영도자로 묘사되었고 시시때때로 간첩이 출몰했다. 어쩌다 등장하는 시위장면은 폭도들의 난동만 나왔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간첩혐의자도 있었다. 칼라 테레비에 신기해하고 지금은 별것도 아닌 청소년 축구 4강 진출에 환호하며 애마부인 류의 영화 포스터에 심장 두근거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은 냉정하게도 고요했으나 대학가 술집 중에 몇 군데에서는 그래도 간간이 분노가 터져 나왔었다. 밤낮으로 최루탄 연기가 가시지 않은 오월의 거리에서 최루탄을 뒤집어썼던 청년들은 고작 막걸리 한잔에 취해 울부짖듯 노래를 불러댔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왜 쏘았지 총! 왜 찔렀진 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그 노래를 주워듣는 소위 기성세대라는 이들은 그게 어디 청춘이 부를만한 노래냐고 비아냥댔지만 왜 청춘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었다.


 87년 유월의 외침을 그리고 91년 봄부터 스스로 사라졌던 뭇 이름들을 민주주의를 만들어간 몸뚱이라고 여겼던 청춘들 중에는 80년 오월의 아픔을 민주주의의 영혼으로 삼았던 이들이 많았다. 한때는 오월의 붉은 장미에게 조차 미안해서 골목길 나서기를 주저했던 청춘들이 많았다.


 듣자하니 요즘은 광주가 시끄러운 모양이다. 이른바 보수단체라는 사람들이 금남로 차선을 막고 집회를 여는데 그 내용이 모두 광주 오월을 폄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집회를 여는지 관심이 없다. 뽕짝을 크게 틀고 춤 난장을 벌이든 특정인을 개새끼 쇠새끼라고 욕하든, 공수부대나 해병대 군복을 입고 짙은 썬그라스를 쓰고 패션을 자랑하든 크게 상관은 없다. “내가 어떤 놈이 맘에 안 들면 그 새끼 개새끼라고 욕 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입니다 여러분” 외치는 연사에게도 “옳소”하고 박수치는 참가자에게도 관심은 없다. 다만 그들에게 당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민주주의를 누가 가져 왔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사치임은 안다. 80년 그해. 오월의 장밋빛처럼 흩뿌려진 피의 금남로에서 오월과 민주주의를 통째로 유린하는 그들의 집회엔 백골단의 곤봉도 없고 지랄탄, 페퍼포그 연기도 없고 닭장차도 없고 강제연행, 수배나 고문 같은 끔찍한 단어도 없고 오직 그들의 시끄러운 난장과 인면수심의 억지가 있다는 것도 안다.



샤먼바위
사진 출처 - pixabay


 술 한 잔에 불콰해지면 노래 한 자락에 정드는 게 사람이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보는 것이, 사찰이나 성당 같은 곳에 가면 스스로 경건해 지려고 노력 하는 게 사람이다. 추모공간에 들어서면 두 손을 모으고 침묵할 줄 아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다.


 바이칼 호수의 항구 리스트뱐카 입구에는 샤먼바위가 있다. 태고 적부터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브리야트족에겐 샤먼바위에 얽힌 전설이 하나있다.


 인근마을의 죄인이 있으면 샤먼바위 꼭대기위에 몸을 묶어 하룻밤을 지내게 했다고 했다. 죽을 만큼의 원한을 샀다면 누군가 한 밤중이라도 찾아와 죄인의 목숨도 빼앗았을 것이지만 아침까지 살아있으면 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풀어 줬단다. 지나치게 관대한 듯도 하지만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죽는 자든 죽이는 자든. 법전이나 정치적 이익에 갇혀 무고한 인사들을 가두거나 처형했던 우리의 현대 사법사(司法史)를 비춰볼 때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 스파시바 시베리아 중에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들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지금은 1000억 원이 넘는 추징금도 내지도 않고 법전에도 없는 전직 대통령 예우까지 받으면서도 여전히 광주학살의 책임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자,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 폄훼의 수장, 80년대 중반 갓 대학 신입생이 보았던 찌라시의 주인공 “살인마 전두환”을 브리야트족의 전통대로 샤먼바위 위에 하루 묶어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 본다. 5.18이후 40년, 대한민국의 법체계에서 해 내지 못했던 일을 브리야트족의 전통을 빌어 그저 상상만 해보는 것이다. 전두환의 시절에는 상상하는 것조차 죄였으나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