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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역사학도(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1-08 18:49
조회
1326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봄비
 봄빈가? 착각이다. 겨울비다. 예보에 따르면 어제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고 한다. 나들이 하러 나선 길에 차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낯설다. 이맘때면 비 대신 눈이 와야 하니까 절기에 익숙해진 내 몸은 빗소리를 낯설게 느끼는 것이리라. 누군가 자연의 계절조차 겨울이 봄인 줄 착각한 거라고 걱정을 하지만, 나는 봄이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애써 낙천적으로 해석하였다.


 며칠 전 학과장인 동료가 신입 대학원생 명단을 보내주었다. 한 달 전 쯤 면접을 마친 박사반에 이어 석사반 신입생들이다. 학부도 신입생 선발을 마쳤다. 이들이 봄의 새싹들이다. 그리고 난 지금 새 학기 대학원/학부 강의 계획을 짜고 있다. 저들이 이 커리큘럼을 마칠 때 “힘들었지만 남는 게 있었다”라는 최고의 칭찬을 남기도록 세심하게. 커리큘럼 곳곳에 지뢰를 숨기는 것도 잊지 않고 음흉하게 웃으며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개강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출처 - 민중의 소리


 역사학개론
 늘 그렇듯이 이번 봄 학기에도 전공필수 ‘역사학개론’을 강의한다. 10년 전, 처음 역사학개론을 맡았을 때, 강의계획서를 본 몇몇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바꾼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때만 해도 역사학개론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었던 것이다. 나는 학과회의를 거쳐 ‘역사학개론’을 필수로 바꾸었고, 수강신청을 정정했던 집나간 어린 양들은, 다음 해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역사학개론은 말 그대로 ‘역사학은 이렇게 공부하는 거다’, ‘이런 걸 배우는 거다’, 라고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시간이다. 전공이니까 역사‘학’이 되지만, 삶이 곧 역사이기 때문에 ‘호모 히스토리쿠스’에게는 역사공부가 곧 인생에 대한 탐구가 된다. 나는 역사공부가 제대로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학생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이란
 역사학개론을 가르치면서 그동안 내가 ‘사실’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사학은 ‘사실’을 다루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리학도가 에너지가 뭔지 모르는 것이나, 문학도가 문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았다. 나는 뒤늦게 ‘사실’을 조금 이해했다. 아둔한 나는 오랜 노력 끝에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정의를 내렸다.


 역사의 사실이란 사회 또는 자연에서 벌어지는(=펼쳐지는) 인간의 행위를 말한다. 사실은 구조(조건), 의지, 우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이 바쁜 나머지 사실 가운데 구조만 생각하면 결정론에 빠지고, 의지만 생각하면 목적론에 빠지며, 우연만 고려하면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에 빠진다. 그렇다고 구조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사는 세상, 사회의 변혁을 생각할 수 없고, 의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책임과 도덕성을 말할 수 없다. 우연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이해할 수 없고, 무엇보다 인간의 비극을 이해할 수 없다.


 헌데 의지는 종종 구조로 변하고, 구조 역시 의지로 자리바꿈을 한다. 내가 의지로 선택한 전공은 선택이 끝난 순간 나의 조건이 된다. 노예이라는 조건은 자각된 의식을 통해 해방의 의지로 거듭나기도 한다. 게다가 사건, 사실마다 구조, 의지, 우연의 배합비율이 다르다. 같은 인간이 없듯이, 세상에는 같은 사실이 없는 법이다. 그래도 자꾸 다루다 보면 지혜가 생긴다. 지혜는 힘이다.


 나의 젊은 벗들이 겪는 낮은 취직률, 불안정한 직장, 무엇보다 연애조차 유보할 정도로 꿈을 삭감당하는 삶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기만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말이다. 그들의 아픔은 그들이 청춘이거나 성실하지 않아서 겪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만하는 어른들이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문제의 반은 해결된 셈이니, 어찌 지혜가 아니겠는가.


 한편 그 사실들은 시간과 함께 흔적도 사라지고, 우리는 기억과 기록을 통해 불완전하게 그 사실들을 붙잡아둔다. 일기를 써도 나의 과거 역사는 일부만 남고, 그나마도 안 쓰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져간다. 역사공부는 이렇게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된다. 다른 모든 배움이 그렇듯이, 바닷가의 조개를 주워 거기 묻은 모래를 살살 털어내면서 조금씩 나은 지식과 지혜를 찾아가는 것이다. 역사공부를 하면 우리 인생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잘 이해하면 잘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명언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시적 표현 속에 분명히 담겨 있는데, 너무 명언이다 보니 정작 묻혀버리는 진실이 있다. 현재=현대 역시 역사라는 점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유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금=현재 역시 그렇게 흘러가는 -때론 흘려보낼 수 있는- 역사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지식은 현재를 지배하는 상식을 상대화한다.


 그 상식은 때론 객관성의 외피를,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성의 외피를 쓰고 있기에 여간한 통찰로는 상대화하기 어렵다. 그 결과 마치 지난 모든 역사가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 진행되어 온 듯 한 착각에 빠진다. 생산력과 기술이 과거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발달한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현실 합리화에 빠지기 훨씬 쉽다. 그런 점에서 역사공부는 보통 사람들이 현재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솔직히 말하면, 반대로 역사공부는 보통 사람들이 현재를 합리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현재의 비판적 상대화는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가 있기에 의미를 가진다. 돌아보건대, 역사학개론 시간에 역사의 연구방법, 주제, 언어와 사료, 사학사 등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짜다보니 역사공부를 통해 열게 될 미래에 대해서는 많이 소홀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돌아오는 봄에 만날 새싹들과는 현재에서 훨씬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데 힘이 되는 역사공부를 하고 싶다. 역사공부를 통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언짢은 삶을 고쳐줄 힌트와 대안을 발견하는 데 더 힘쓰고 싶다. 그렇게 될 것이다. 기다려라, 동지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