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권성동 무죄 판결은 예견된 것이었다(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6-26 17:08
조회
1625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는 겁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배심원들>에서 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을 이끌게 된 부장판사(배우 문소리)는 법을 전혀 모르는 배심원들과의 첫 만남을 이 전복적인 대사로 시작한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집는 이 대사는 영화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다. 이 멋진 말은 나중에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또 다른 대사와 만나고, 영화의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판사가 피고인의 유죄를 확신할 수 없을 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아름답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벌할 수는 없다”는 인권 우선의 전통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이 아름다운 문장을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했다. 며칠 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의 판결문.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견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피고인의 이익”에 복무하기로 작심한 판사들은 권 의원의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직접 청탁을 받았다는 최흥집 강원랜드 사장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권 의원이 직접 청탁했는지 입증이 부족하다고 했고, 권 의원이 실제 최흥집 사장에게 채용 청탁을 했더라도(!), 당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며 ‘알아서’ 점수 조작 등을 한 강원랜드 인사팀에 대한 업무방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최 사장한테서 ‘감사원 감사를 신경써 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받고, 그 대가로 자신의 의원실에서 비서관으로 일했던 인사를 강원랜드 경력 직원으로 채용하게 한 혐의에 대해서도 “청탁은 있었지만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채용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모든 쟁점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가리고 법리를 다툴 시간도 능력도 내겐 없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아름다운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은 권성동 같은 유력자들에게만 적용되는가.


 멀리 갈 것 없이 채용 비리 사건만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기억하기에 박근혜 정부 이후 채용 비리 사건에 연루된 자유한국당 인사는 네 명이다. 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 권성동·염동열 의원, 김성태 전 원내대표가 그들이다.(이 사회의 진정한 주류 기득권으로서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채용 비리는 일종의 관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대학생들 앞에서 아들의 채용비리 의혹을 셀프 제기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황 대표 아들의 케이티 입사 시점은 김성태 전 원내대표 딸의 정규직 입사 때와 같다.)



왼쪽부터 권성동, 김성태, 최경환, 염동열 의원
사진 출처 - 한겨레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채용비리 사건에서 눈여겨 봐야할 공통점은, 채용을 청탁하거나 압박한 쪽은 한 명도 구속되지 않았지만, 청탁을 들어준 쪽은 예외 없이 모두 구속됐다는 점이다. 박철규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최경환), 최흥집 강원랜드 사장(권성동·염동열), 이석채 케이티 회장·서유열 사장(김성태) 등이 모두 구속된 적이 있거나 구속된 상태다. 뇌물 사건의 경우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을 동시에 구속하거나 한 쪽만 구속할 경우 받은 사람만 구속하는 게 일반적인데(김정주 넥슨 회장 불구속, 진경준 검사장 구속), 이와 비교해 봐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최근 끝난 드라마 <국민 여러분!>이 정확히 묘사했듯이 현역 국회의원은 아무리 파렴치한 짓을 해도 끝까지 부인하고 감옥에 가지 않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


 일단 검찰부터 관대하다. 최경환, 권성동, 염동열 모두 불구속 기소했다. 김성태의 경우 <한겨레>가 딸의 케이티 특혜채용 기사를 처음 쓴 게 지난해 12월이었는데, 여섯 달 뒤인 지난주에야 비밀리에 소환조사를 했다고 한다. 검찰의 숱한 권력 중 하나가 바로 이 비공개 소환조사다. 누구를 망신 주고 누구를 숨겨줄지 오로지 검찰이 정한다.(최경환은 구속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데 최경환이 구속된 것은 채용 비리가 아니라 국정원 특활비 수수, 즉 뇌물 때문이다.)


 권성동 1심 무죄는 예견된 것이었다. 최경환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특히 2심 판사는 직권남용죄와 강요죄 모두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산하기관에 채용을 요구한 행위가 국회의원의 일반적 직무에 해당하지 않아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했고, 강요죄에 대해서도 최경환이 중진공 이사장의 의사 결정의 자유를 방해했다고 보기 어려워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현령비현령 논리다. 청탁을 받은 직원들이 업무 자율성이 있어서 업무 방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권성동 1심 재판부와 닮은 데가 많다. “피고인의 이익으로!”


 최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됐다. 네 차례 집회에서 폭력 행위를 주도한 혐의라는데, 이미 구속된 민주노총 간부 3명 등과 함께 폭력 행위를 사전에 공모했다는 경찰의 주장이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신에 이를 만큼 입증이 되었는지 묻고 싶다. 물론 나는 집회에서의 폭력 행사에 반대한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는 게 달라진 시대에 걸맞는 성숙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노총 위원장이 폭력행사를 사전에 모의했다는 경찰 주장은 믿지 않는다. 그럴 만한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모의했다면 여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일 텐데, 그건 모든 언로가 막혀 있던 80년대에나 통하던 얘기다. 민주노총이 그런 저차원적인 전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화가 난 일부 참가자가 폭력을 휘둘렀거나 무리한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집회에서의 폭력은 경찰과의 쌍방 폭행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찰은 관행대로 영장을 신청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발부한 판사에게 묻고 싶다. 채용 비리와 집회에서의 폭력행사 중 어느 것이 더 위중한 범죄인가. 권력과 지위가 있는 자들이 인맥을 동원해 반칙을 일삼는 것만큼 반사회적인 범죄가 또 있을까. 숱한 젊은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불신과 박탈감을 심어준 채용 비리보다, 국부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와 경찰의 다툼이 사회를 더 불안하게 한다고 판사는 생각하는 것일까.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아름다운 원칙은 왜 권력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