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괜한 긁어부스럼일까, ‘우키시마마루호’를 상상하며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14 16:56
조회
2437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일본 교토부(京都府) 북단에 마이즈루(舞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동해에 인접한 마이즈루만을 끼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의 군항이었고, 패전 이후에는 ‘전력불보유’를 명기한 헌법에 따라 그저 그런 항구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슬슬 군함들이 들어섰고, 1954년 이후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해상자위대 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2. 패전 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부터 56년 사이에 마이즈루항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어있던 60여만 명의 일본군 및 민간인들 상당수가 송환되면서 어떤 이들은 억류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증언해줄만한 각종 기록물들과 물품들을 가져왔다. 이 유물들을 전시해둔 건물이 "마이즈루히키아게(引揚)기념관"이다. 이 기록물들은 2015년 ‘유네스코세계기억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류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집단 기록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일본에서는 이 기념관의 각종 전시물들을 반전(反戰) 및 평화를 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평화를 꿈꾼다니 좋은 일이다.


 3. 그런데 일본인 억류자의 참상을 기억하게 해주는 그 현장 아래에 가려져 있는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고, 왜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은...


 1945년 8월 24일,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수천 명(5~6천명?)을 태우고 일본 동북부 센다이 인근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송환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의문의 폭발로 마이즈루만에서 수장되다시피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시신 524구와 일본 해군 승무원 시신 24구를 수습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조난자 대부분을 구조하지 않았다. 추정컨대 최소 3천명에서 최대 5천명은 바다 속에 고스란히 가라앉았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매설한 기뢰 때문에 폭발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생존자의 증언 및 사후 실험 결과는 누군가에 의한 고의적인 폭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누가 그랬던 것일까.


 끔찍한 것은 침몰 9년이 지나도록 뱃머리는 수면 위로 솟아 있었고, 강제수용소에서 귀환하는 일본인 송환선은 그 위 또는 그 주변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마이즈루항을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수천의 시신이 형체도 없이 삭아가고 있었을 그 바다 위로 어떤 이는 환영을 받으며 귀환하는 현장을 어떤 말로 형언해낼 수 있을까.


 배는 9년 동안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채 흉물스럽게 녹슬어갔고, 그 사이 한국 정부도 이 사건을 규명하지 않았다. 그러던 1954년 일본 정부는 선체를 인양해 고철로 팔아넘겼다. 사건을 규명할 증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사람을 구조하지 않기는커녕 어쩌면 의도적으로 수장시켰을지도 모를 사건 자체도 개탄스럽지만, 5천에 가까운 조선인 시신들이 가라앉아있을 그 바다 위로 일본인 송환선이 수도 없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었을 장면을 상상하면 소름마저 돋는다. 조총련에서 일부 일본인의 협조를 받고 마이즈루시의 허락을 얻어 1978년 수장지가 바라다 보이는 근처 뭍에 기념비를 세워놓지 않았더라면,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잊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출처 - 필자
우키시마마루호가 침몰한 지 9년 동안 기관총, 레이더 등 배의 상부가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4. 한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 했지만, 결국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에서 이를 다룬 영화(“살아있는 령혼들”, 2000년)를 제작하기도 했고, 기뢰로 인한 우연한 폭발인지 살인에 가까운 계획적인 침몰인지 모의실험을 한 바도 있다 한다. 그 마저 없었다면 수천 명의 목숨이 기억에서조차 증발해버리는 희대의 아이러니가 되고 말 뻔 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외쳤을 비명 소리, 삭아가는 시신, 그 위로 설레며 귀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교차시키노라면, 그 이상의 희극 같은 비극을 상상한다는 것을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싶다. 이런 문제를 떠올려보지도 얘기해보지도 못한 채 한일 간의 미래와 인류의 평화를 이야기하려니, 그저 공허할 뿐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