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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죽이는’ 정치학과 ‘함부로 돈 쓰지 말라’는 경제학 (이재승)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1-07 10:25
조회
1045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혁명을 통해 등장한 정부는 적폐청산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연일 실시간으로 지난 정권의 추악한 뿌리를 보고 있다. 이제 처벌과 응징이 기본이다. 악인에게 처벌가능성을 배제하고 설거지만 해준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원점에서 불법과 범죄를 자행하는 것이 그간 국정원의 행태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의 이 건전한 판단과 그들의 저 건전한 희망을 이번에는 여지없이 깨뜨려주기를 기대한다. 적폐청산은 현 정부의 슬로건이 아니라 촛불시민의 구호였다.


  적폐의 밑바닥에 또 적폐가 있다. 적폐중의 적폐는 공권력이 자행한 학살(제주4.3학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고, 그 학살을 유야무야, 값싸게 뭉개버리는 역대정부와 관료들의 방침이다. 현 정부가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더라도 국가가 피해자를 구제하지 않는 한 그것은 현 정부의 적폐이다. 국제인권법은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실효적인 구제가 없는 상황 자체를 계속적 침해나 계속범(CONTINUOUS CRIME)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피해구제가 없는 한 시효(소멸시효,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가 국제법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필자는 최근에 제주4.3사건법의 개정시안 준비작업에 관여하고 있다. 제주4.3사건법은 2000년 김대중 정부 아래서 제정되었고, 2007년 노무현 정부에 의해 약간 개정되었다. 원래 법안은 진상조사와 보고서작성을 목표로 한 낮은 수준의 과거청산법이었다. 제주4.3사건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도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대통령의 공식사과, 제주4.3평화공원 및 재단의 설치, 기념일 지정, 약간의 생활지원비 지원 등이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준비작업단은 바로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다행히 지난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포함해서 주요정당의 후보들이 한결같이 제주4.3사건의 해결을 약속하였고 문재인 정부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정리’를 100대 국정과제로 확정하였다.


  그런데 <국정과제>를 들여다보면 지시 관계의 교묘함으로 인해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완전한 해결을 목표한다고 써놓고 피해회복, 보상에 대해서는 서술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국정과제를 확립한 그룹이 2005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이른바 ‘피해자 권리장전’을 읽어보았는지 궁금하다. 국정과제의 제1고지가 집권하자마자 물러서기 전술인 모양이다. 현 정부는 금세 관료들의 품안에서 퇴행을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행자부 장관은 제주4.3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을 면담한 자리에서 과거사정리를 약속하면서도 공무원들의 발언이라며 “돈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표현을 에둘러 인용하였다. 올바른 일을 하는데 돈쓰는 것이 아까우면 권력은 왜 잡고 정의는 왜 외치는 것인가? 정의를 정권장악에는 동원하고 정책에는 반영하지 않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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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피해자 권리장전
사진 출처 - 구글


 

  피해보상은 돈 드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하는 일중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없다. 학살이라는 불량한 정치를 자행했던 국가에서 공직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살에 어울리는 경제학을 가져야 한다. 곳간 열쇠를 쥐고 있다고 그 자신이 국가인 것은 아니다. 공직자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법”을 배우기 전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법”을 터득했어야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숨 돌릴만하면 국가가 자기 것인 양 하는 공직사회를 보기에 민망하다. 4대강이라는 어리석은 일을 반대하다가 잘려 나간 공직자가 몇이나 되는가? 4대강 사업에 반대한 사람들 명단이나 작성했던 그들이 아닌가! 학살에 반대한 군인이나 경찰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저 시키는 일이라며 총질을 해대는 것이 이 땅의 공직자들이었다.


  1년 전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현 정부가 제시한 국정과제에 모두 합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공통될 것이다. 국민은 정권교체만 바란 것이 아니라 권력의 성질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백남기 사건에서, 국민은 인간을 멸시하는, 그 징그럽게 차가운 권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촛불을 든 것이다. 다시 한 번 공직자들에게 ‘피해자 권리장전’을 읽기를 권유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에 혁명을 생각하게 한다. ‘피해자 권리장전’은 <만족>, <재발방지의 보증>이라는 항목에서 군인 경찰, 공직자에 대하여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점을 깨알같이 명시하고 있다.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던 공직자들도 정의의 적이 되기는 매우 쉽다. 천부적 공직자는 없어도 천부인권은 존재한다. 학살의 피해자들은 정부에게 시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로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는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