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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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늘공’들이 안 움직이고 눈치만 본다는 얘기를 ‘어공’한테서 처음 들은 게 2023년 초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고 반년 남짓 지났는데 복지부동이라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전임 정부에서 뭔가 열심히 한다고 했던 사안은 죄다 감사받고 수사받고 압수수색받는다. 그럼 5년 뒤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경협이라도 나섰다간 수사 받기 십상이다.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기업투자 유치에 노력하면 배임이니 직권남용이니 시달린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친환경에너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면 좌파정부 부역자 소리 듣기 딱좋다. 생각해보면 현재 탈탈원전을 추진하던 정부부처 담당 부서는 얼마 전깍지 탈원전 업무 담당 부서일 수밖에 없다. 만약 다음 정부에서 탈탈탈원전을 한다며 탈탈원전을 탈탈 턴다고 해보자. 탈탈 털리는 사람과 탈탈 터는 사람이 모두 같은 부서 같은 사람들이다. 결국 공무원으로선 탈탈탈원전 시대를 대비해 탈탈원전에 진심을 담으면 안된다.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복지부동만이 살 길이다. 압수수색 당하고 감사 받기 싫으면 적극적으로 일하면 안된다.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했다는 말을 약간 비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복지부동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이 정부 핵심가치다. 복지부동을 강요하는 정부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특수활동비로 회식하는 걸 보면 그닥 청렴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물 밖에서 물이 더럽다고 물고기를 괴롭힐 뿐이다.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 적극행정을 하는 건 ‘3사’ 뿐이다. 검사, 감사, 용궁 사진사. 대통령실로 파견돼 일하는 늘공들이 너도나도 복귀하고 싶어하는 반면 후임자를 찾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본부 복귀를 못해 애를 먹는다는 얘길 들은 건 2023년 말이었다. 그럴만도 하다. 2022년부터 죽어라고 일했는데 지금껏 승진한 사람이 없단다. 처음엔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이제는 진실을 알아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 존재구나.’ 하긴, 노비가 일 열심히 했다고 승진했다는 얘기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공무원들 가운데 가장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대통령실이다. 대개 승진을 앞두고 있고,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일 잘하고, 일 잘할 준비가 된 공무원들이 대통령실로 파견된다. 1년 가량 죽어라 일하고 승진해서 친정으로 금의환향하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게 이번 정부에선 깨졌다. 복지부동의 거대한 그림자가 대통령실도 덮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뭔가 강력한 정책을 내놓고 얼마 뒤 “엄청 강력한 대책”이 나오고 또 얼마 지나면 “진짜 겁나게 강력한 대책”이 나온다. 그리고 잊을 만 하면 도돌이표다. 마약이 그랬고 저출산이 그랬다. 킬러문항이 그랬고 이태원이 그랬다. 이념을 바로 세우는 것과 이권카르텔척결에 엑스포까지, 어느 것 하나 차분하게 준비해서 나온 게 없고 “강력대응”이니 “원점재검토”니 하는 말이 따라붙지만 마무리가 제대로 된 것도 없다. 남은 건 그냥 혼란과 갈등, 어퍼컷과 떡볶이 뿐이다. 중국에서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인데, 딱 그렇다. 미국 예를 들면 트루먼이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던 아이젠하워가 당선된 뒤 했다는 말이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아이크.” 결국 하던 버릇대로, 익숙하고 쉬운 것만 하게 된다. 전국 교정시설(교도소와 구치소) 수용자는 지난해 10월 기준 5만 8945명이었다. 정원이 4만 9918명이니까, 정원 대비 118%다. 2016년(121.2%)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정원 대비 수용률이 꾸준히 감소해 2022년 104.3%까지 줄었다는데 1년만에 말 그대로 폭증했다. ‘나쁜 놈 잡아 가두기’라는 전공을 살리는 것 같긴 한데, 그런다고 나라꼴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이런 와중에 선거가 다가오니 각종 선심성 정책이 난무한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긴축을 한다면서 다주택자와 대기업을 위한 각종 세제지원을 내놓는다. 재정건전성이 중요하다면서 각종 감세에 여념이 없다. 둘 중 하나다. 애초에 재정건전성에 관심이 없거나, 재정건전성이 뭔지 모르거나. 아마 둘 다 정답일 듯 하다. 재정건전성은 복지정책 반대할 때나 필요한 논리고, 애초에 국가재정과 집안살림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를 못하니까 나라빚에 바들바들 떤다. 그러면서도 다음주엔 또 어떤 대기업과 다주택자 세제혜택이 나올까 싶다. 정부에선 ‘감세’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 건 가렴주구이자 ‘반서민 정책’이란다. 하지만 말입니다. 세금을 적게 거두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책임지기 싫기 때문이다. 독재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낮고 민주국가일수록 조세수준이 높은 건 다 이유가 있다. 북한은 ‘세금없는 지상낙원’을 자랑으로 여기고 스웨덴 같은 나라는 평균적으로 월급 절반을 소득세로 원천징수한다. 출산파업과 인구감소, 고령화, 수도권 양극화와 지방소멸, 남북관계, 심지어 이념을 바로 세우는 문제까지도 ‘지당하신 말씀’과 ‘강력한 대책’ 그리고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떡볶이 먹방’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이 하루 하루가 흘러간다. V2 표현을 빌어 글을 마무리한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4-01-17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9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故 이선균씨의 빈소> 사진: 매일신문  배우 이선균이 죽었다. 법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에서 시작됐다. 경찰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사회적 인격 살해에 앞장섰다. 언론은 그를 마약범으로 단정한 채 대중에게 내던져 인격살해에 공조했다. 대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공인’들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회적으로 죽어도 되는 존재로 취급 하는 혐오주의에 빠져있다. 혐오주의에 빠져 있는 대중과 혐오주의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권력기관들이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았다. 사진: 한겨레  이재명 대표가 피격 당했다. 어떤 자들에게 배우 이선균이 죽어도 되는 존재였다면, 살해미수범에게 이재명 대표는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살해미수범이 말하는 이재명 대표를 살해해야하는 이유들은 당연히 매우 병적이다. 그러나 그 병은 단독범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정치적 테러범들이 가지는 혐오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혐오는 사람을 마음속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악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그런 혐오가 집단화되어 나타나면 혐오주의라 부를 수 있다. 혐오주의가 권력과 결탁되어 구조화되면 혐오 사회라 부를 수 있다. 두 사건은 모두 권력집단들이 직간접적으로 결탁되어 있거나 네트워크화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 대중들이 혐오권력에 완전히 포섭된 상황은 아니기에 혐오사회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기관이 혐오를 조장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혐오시대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이선균 배우와 이재명 대표는 전형적인 혐오 시대의 피해자들이다. 혐오주의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도덕적 절대주의이다. 혐오주의자들은 늘 그들 기준대로 선한 편과 악한 편을 가른다.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적 도덕관을 적용한다. 배우 이선균에게는 ‘공인’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내세웠다. 우습게도 ‘공인’이라는 절대적 도덕 기준은 실정법보다도 더 상위에서 작동한다. 경찰은 그가 ‘공인’이라는 이유로 혐의만으로도 실정법 조차 무시하고 조리돌림 할 수 있고, 언론은 ‘공인’에게 적용되는 알 권리를 내세워 사생활까지 무참하게 짓밟았다. 대중들은 존재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까지 알권리로 착각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조롱했다.  야당 대표 이재명에게는 늘 누구보다도 강하게 ‘진보주의자’라는 도덕적 절대기준이 적용되어왔다. 진보주의자들조차 그에게 없다고 주장해 온 ‘싸가지’는 살인범보다 더 가혹하게 사회적 매장의 빌미로 작동했다. 도덕적 절대기준이 횡행하는 혐오주의 사회에서는 ‘싸가지’가 없다는 규정 하나만으로도 쉽게 누구든 사회적 죽음을 몰고 갈 수 있다. 당연히 누구라도 ‘싸가지’까지 있으면 좋다. 그러나 싸가지까지 있는 진보주의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싸가지’를 규정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것들은 권력자들이 규정하고 대중은 따라간다.  이재명 대표가 혐오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의외로 조용하다. 왜일까? 이재명 대표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싸가지’가 없어 죽어야할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살해는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고, 결국 물리적 살해까지 시도된 것이다. 살해 기도 이후 권력자의 태도에서도 그런 혐오주의는 쉽게 드러난다. 경찰은 야당대표 살해미수사건을 몇 만원 관련된 이재명 대표의 법인카드보다도 조심스럽게 수사하고 있다. 언론은 살해까지 기도되는 배경에는 관심이 없고 “헬기 특혜”니 “부산 차별”이니 하는 아젠다를 만들어 혐오 프레임을 작동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다. 한동훈 위원장이었다면 그랬을까? 혐오 프레임에 갖힌 혐오사회의 대중들에게 헬기 한번 타는 “특혜”는 혐오의 대상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젠다가 된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상대가 나쁘기만 하면 된다. 어느 시대나 편견이나 증오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늘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개체가 필요하다. 브라이언 레빈 증오극단주의 연구소 소장은 편견이나 혐오적 표현이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촉매제는 대개 정치인과 같은 권력이 개입할 경우라고 밝히고 있다. 정치권력과 결탁된 증오범죄는 혐오시대를 열게 된다. 트럼프 시대 이후 극우들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는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후 갈 곳을 몰라 헤매던 반공주의자들이 찾아낸 대체품이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그들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 그들의 무기는 혐오주의이다.  물론 지금의 정치권력이 이재명 대표의 살해를 직접 교사했다는 증거는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그럴 가능성 또한 많아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이 레빈이 지적한 혐오사회를 여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은 이재명대표의 범죄를 기정사실화하고 끊임없이 압수수색을 했다. 이재명 대표가 적어도 사회적 살해를 당할 때까지 계속할 모양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야당대표와 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한동훈 위원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내놓은 일성은 야당공격이었다. 그의 임무는 당의 비상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당에 대한 혐오를 키우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권력자들의 행동은 카롤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주장한 대로 대중들을 동원하는 하나의 기표로 작동한다. 권력자들의 끊임없는 적대적 행위는 혐오시대를 연다. 혐오시대에 혐오의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쉽게 죽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국승민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시기 트럼프대통령이 중국을 비난하는 트윗을 한번 올릴 때마다 인종차별적 트윗은 20%가 올랐고,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는 8%가 증가했다.  권력자들의 혐오주의 전략은 끝내 이재명 대표를 감옥으로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맹목적 우군인 혐오 세력을 키우는데 성공할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당장 다음 주에 민주당을 탈당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자칭 ‘진보주의자’인 한 정치인의 탈당 변을 보더라도 이런 사실은 충분히 드러난다. 그의 출마의 변 대부분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혐오주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혐오주의는 보수주의의 신의 한 수 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아직 도덕의 시대가 오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선출된 권력의 힘을 너무 과신했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면 민주주의는 꽃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야만 권력은 30년간 쌓아온 민주주의의 토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강고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군부가 합법을 가장하여 국정을 농단하기 위해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던 시대의 권력구조는 여전히 강건하게 남아있다. 그때가 군부였다면 지금은 검찰일 뿐이다. 검찰권력만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재벌은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검찰권력의 손아귀에 있고, 언론은 군부의 하수인에서 검찰의 하수인으로 변신했다. 군부와 손잡았던 미국은 이제 검찰권력과 손잡고 동아시아의 신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다. 그런 권력들이 여전히 대중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그들의 권력을 지키고 있다. 그때 사용했던 무기가 반공주의였다면 지금은 혐오주의이다.  혐오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식민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주의는 도덕률이나 공동체의 발전보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숭상하는 식민성과 불평등한 국가간 체제인 식민체제로 구성된다. 아직 우리는 식민주의를 결코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의 권력자들은 매일 미국과 일본이라는 더 큰 권력이 자신을 비호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있다.  이선균 배우를 수사한 경찰의 태도는 공정한 수사라기보다 과시적 수사였다. 더 큰 권력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사였다. 이재명 대표 살해미수범의 확신은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만족을 얻고자하는 큰 권력의 네트워크에서 학습된 혐오이다. 그 권력의 윗자락에는 세상을 여전히 적과 우리로 나누고 신냉전을 지향하는 신식민주의적 체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여기는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다.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미국의 반인종주의자 아히브람 X 켄디는 반인종주의자를 정의하면서 ‘반인종주의자는 나는 반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종주의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야만 권력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혐오주의에 빠져들게 아니라 혐오주의를 넘어 야만권력과 싸울 우리들의 무기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눈 앞의 대상은 비도덕주의자들이 아니라 혐오시대를 만들어 다시 죽음의 행진을 만들고 있는 정치권력이다. 이번 총선은 큰 싸움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부디 총선 전까지만이라도 누구의 싸가지를 말하기보다는 야만 권력의 회귀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더 많이 말하자. 누구의 싸가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권력자들이 밤낮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까지 거기에 힘을 보태는 어리석음은 당분간만이라도 사양하자. 힘을 결집하자. 내부에 도덕적 절대주의를 들이대며 서로 분열하지 말자. 어떻게 야만권력에 저항할 것인가를 더 이야기하자. 권력자들과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과 싸우자. 지금은 하나되어 야만권력과 싸울 시기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1-10 | hrights | 조회: 450 | 추천: 10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출처: 경주시청 “역사를 돌아보면 정답은 뻔히 보이지만 당대는 늘 혼돈이고 집단적 착각이 난무한다. 얼마나 많은 주장들이 역사적 헛소리들인지, 당대를 규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디.” (조선희, “그리고 봄” 중에서) 인권연대로부터 발자국 통신 원고 청탁 문자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원고 마감이 1월 1일까지란다. 엄청 부담스럽다. 새해 첫날이니 좋은 덕담도 해야 하겠고, 새해를 전망해 보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해야 할텐데 지금 시국에 그게 가능하겠나 하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낙망과 좌절, 우울한 나날들이 많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새해 첫날 좋은 이야기를 해야지, 왜 지나간 날들의 우울을 되씹는가 하는 항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새해라고 모든 것이 다 장밋빛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 1년 반을 돌아보면 우리사회가 어떻게 이렇게 급속도로 망가져 갈 수 있는가 하는 자괴감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해 놓았던 일들이 결국 이 정도였던가 하는 한탄, 어처구니 없는 사태 진전을 바라보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무력감 등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나이를 먹었다고 더 지혜로워 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을 갈아엎는 꿈을 꾸기에는 이제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다. 1200만 명이나 봤다는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멀쩡한 정신으로 보기 어려워 아직도 엄두를 못내는 것도 따져보면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분노로 발산할 수 있는 에너지도 이제 총량에 한계가 오는 것 같다. 작가 조선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동안 쌓였던 분노와 스트레스의 에너지로 터빈을 돌렸다면 아마 온 집안이 쓰고도 남을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탱크와 중앙정보부, 보안사, 정보경찰 등을 겹겹으로 동원하여 촘촘히 자신의 장기독재를 위한 그물망을 짰던 박정희도 결국은 그의 심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79년 10.26은 18년 박정희 장기독재에 저항해 나선 그해 10월 부마항쟁의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시효를 다한 “유신 독재”는 이제 다가올 “서울의 봄”에 그 자리를 물려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 “봄”은 12.12를 거쳐 저 통한의 5.18로 이어졌던 것 아닌가? 1979년 10월 25일, 하루 앞으로 다가온 박정희의 죽음을 예측한 “당대인(當代人”도 없었을 뿐 아니라, 10.26에서 12.12를 예견하고, 거기에서 이듬해 5.18을 가늠해 본 사람도 없었다. (44년이 지난 지금은 뻔한 역사적 현실로 되었고, 20대 젊은이들은 영화관에서 그 역사를 배우게 되었지만) <1945년 12월 16~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출처:울산저널 1945년 해방의 혼란기 속에서, 미소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남북분단을 피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오늘날에 와서 보건대,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1945. 12) 결과를 따르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전승국인 미.영.중.소 4개국이 후견하는 조선임시정부를 거쳐 5년 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것이 골자인데,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그나마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권력장악에 골몰한 이승만은 이 이슈를 찬탁 대 반탁의 구도로 몰고 가면서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끝내 분단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찬탁/반탁 대결구도에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만을 앞세웠던 백범 김구는 결과적으로 “행동대장”의 역할을 맡았을 뿐, 현실적으로 분단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이후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르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북쪽의 분단정부를 추진하고 있던 김일성의 각본에 “놀아 난” 꼴이 되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본다면 미소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는 당시적 상황에서, 여운형과 김규식 등 온건세력이 추진했던 좌우합작노선이 그나마 분단을 피할 수 있었던 합리적 방안으로 보이지만 역사는 그 쪽으로 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뻔한 일이 돼버린 일들이, 당대의 시각으로는 어느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중요하고, 당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흐름, 각 정파의 이해관계, 시대적 주역들의 역량, 이런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상황을 판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인데, 이런 전지적 시점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또 흐름, 대세와 관계없는 자신의 신념, 교조가 객관적인 정세 판단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인용하는 것이 적당하지는 않지만 백범 김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으냐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아닌가로 판단해야 한다.” 그는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침탈한 뒤 중국까지 먹어들어 오는, 소위 일본이 천하대세인 시절에 일본군대의 만분의 일도 안되는 병력으로 광복군을 조직히고, 윤봉길, 이봉창의 항거를 조직하며 일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 독립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기 때문에 풍찬노숙과 유랑을 마다하지 않으며 일제 36년을 버텼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신념에 따른 정세인식으로 해방공간에서 반탁의 선봉에 서고, 결과적으로 정적인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시나리오에 일조를 하게 된다. 뒤늦게 분단을 막고자 북행길에 오르지만 이미 대세는 냉전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남북의 분단세력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시속에 밝았던, 그래서 조국을 배반하게 된 인물들은 어땠을까? 매국 5적의 첫 대가리에 오르게 된 이완용은 당대 최고의 수재라고도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그가 이해한 당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지고 미개한 조선민중을 대일본제국의 충용한 신민으로 살게 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마찬가지 질문을 한때 “조선의 문호”라고도 불리웠던 춘원 이광수에게 던져 본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나온 그에게 검찰관이 물었다. “왜 친일하였는가?” 이광수 왈, “나는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소.” 이건 믿음, 소신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대를 인식하는 빈약하고 천박한 역사의식의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앞의 먹을 것을 탐하는 개돼지의 본능이었을까?  당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1찍”이니 “2찍”이니 하는 상호를 향한 멸칭(蔑稱)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인식의 소산일 것이다. 현대가 담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세계 몇 번째로 3050 클럽(3만불 이상 소득, 5천만 이상 인구)에 들었다거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모범적으로 달성한 나라가 됐다거나 하며 한동안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착각에 푹 빠져 있다가 지난 1년반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독선, 파렴치함에 진저리 치다가도,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정권이 등장하게 된 함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달성했다고 믿었던 산업화, 민주화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었나 하는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저런 형편없는 정부를 갖게 된 현실에 분노하다가, 그걸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의 모습을 보면 더욱 열이 치솟는다. 두 정치세력의 모습은 마치 편도 2차선 국도를 가로막고 서로 추월 경쟁을 하는 거대한 탱크로리 같다. 그 탱크 안에 담긴 게 서로 다른 거라고 주장하지만 그것도 알 수 없다. 어느 차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두 개 차선을 꽉 막고 서로 도긴개긴의 추월경쟁을 하는 그 뒤로 많은 차량들이 정체해 있는 모습만이 암담하다. 이런 모습이 당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자기희생 없는 정치, 독점의 정치, 앞을 보여주지 않는 정치, 이게 과연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은 100도가 되면 끓고, 가스는 덮어 놓으면 폭발한다. 한국 사회의 여전히 무한한 에너지를 가로막고 있는 이 과두독점 정치의 끝은 어디일까가 궁금해지는 새해 아침이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
2024-01-03 | hrights | 조회: 572 | 추천: 11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있는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은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두 박물관 사이를 가르는 도로명은 익시비션로드(Exhibition Road). 19세기 중반에는 런던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던 사우스켄싱턴에 박물관들이 건립되면서 생긴 거리 이름이다. 2017년 새로 만들어진 새클러 코트야드(Sackler Courtyard)는 익시비션로드와 연결되어 출입구와 공공 광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 사진: 염운옥 <익시비션로드 새클러 코트야드> 사진: 염운옥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디자인과 장식예술 전문박물관으로 전시가 색다르다. 보통 박물관에서는 진본성(authenticity)이 중시된다. 유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가 전시실에 놓일 자격을 따지는 최우선 요건이다. 하지만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다르다. 전통적인 박물관처럼 진본도 소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박물관에 놓이지 않는 복제품(replica)이 놓여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답게 창조를 위한 모방에 걸작을 활용한다. 가구 전시 갤러리에는 의자를 잘라 단면을 보여주며 어떤 재료가 쓰였으며, 재료의 질감은 어떻게 다른지 느낄 수 있도록 관람자에게 직접 만져보게 하는 전시도 마련하고 있다.  디자인 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은 기원과 관련된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1815년 세계 최초로 열린 박람회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에서 유래했다.1) 성공적으로 끝난 대박람회 수익으로 정부는 사우스켄싱턴에 장식예술과 산업을 위한 박물관을 건립했다. 1857년 개관 당시 명칭은 사우스켄싱턴박물관(South Kensington Museum)으로 뒤떨어진 영국 제조업의 디자인을 개혁하고 소비자 대중의 취향을 교육한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19세기 말 현재 명칭이 바뀌었다.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인도 유물이 많기로 유명한 박물관이다. 사우스켄싱턴박물관으로 개관할 때 인도박물관(India Museum) 컬렉션을 대부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인도 유물의 수집 주체는 동인도회사였다. 1600년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 영제국 팽창의 주역으로 기능하면서 제국의 유물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권이 벵골만 콜카타에서 마드라스, 실론, 봄베이를 거쳐 인도 아대륙 전체로 넓어지면서 수집 지역도 점차 더 확대되어 갔다. 동인도회사가 수집하는 지역은 지배권이 확고한 인도를 넘어 동쪽으로는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자바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만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동인도회사의 유물 수입 경로는 군사작전과 교역, 행정조사가 결합된 체계적인 프로젝트였다. 현지에서 표본과 보고서가 도착하면, 이를 과학적 자료로 목록화했고, 각 분과학문과 학회의 연구용 자료, 그리고 새로운 수집 프로젝트 수립을 위한 토대로 활용했다. 동인도회사는 과학 실천에 필수적인 정보와 소통의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컬렉션 기반의 분과학문 성립과 발전에 기여했다.2)  영국의 해상무역 종사 상선 선원과 동인도회사 관리, 영국 육군, 영국 해군은 해외로부터 꾸준히 수집을 수행했다. 동인도회사 관리는 아마도 선박에 소량의 개인화물을 실을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제한된 규모로 사적인 거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기심의 방이 유행하면서 외국산 그림, 진귀품, 자연사 표본 등의 상업 거래 시장이 유럽에 활성화되어 있었음을 떠올리면, 동인도회사 관리들이 이런 방식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인도에 체류한 유럽인들의 많은 개인 수집품은 영국으로 보내져 가문의 재산으로 상속되었다.3)  인도에서 제국의 중심 런던으로 들어온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집품은 처음에는 회사 관리와 회사 관련 유력자들의 개인 소장품이었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런던탑에는 무기와 갑옷이 전시, 린네학회는 자연사 표본을 소장했다. 하지만 가장 대규모로 인도 유물을 수집, 소장했던 곳은 인도박물관이었다. 인도박물관은 1801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런던 리든홀스트리트(Leadenhall Street) 동인도하우스(East India House)에 문을 열었다. 동인도하우스는 기업의 본부인 동시에 물질문화의 전시장이었다. 인도박물관은 런던으로 사물과 정보가 집중, 축적되는 과정의 일부였다. 인도박물관의 설립은 개인적, 비공식적이었던 수집을 탈개인화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동인도회사 이사회(the Court of Directors)4)가 수집에 관여, 개입, 관리하기 시작함으로써 관리 방식을 중앙집중화, 체계화했다.5)  인도박물관은 군사작전으로 획득한 약탈품의 공식적 저장소였다. 동인도회사의 영토 팽창에 따라 방대한 수고본, 회화, 보물, 진귀품 등이 수집 축적되었고 대중에게 전시됐다. 1820년 인도박물관 가이드북에 따르면, 무기, 갑옷, 왕관, 보석, 그리고 ‘티푸의 호랑이(Tipu’s Tiger)’가 관람객에게 인기를 끌었다. ‘티푸의 호랑이’는 남인도 지배자 티푸 술탄이 소장했던 소형 자동기계 오르간이다. 호랑이가 영국 병사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하고 있다. 뚜껑을 열면 병사의 비명소리와 호랑이 울음소리가 난다. 이 유물은 원래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승리의 상징으로 제작되었으나 영국이 이 지역을 점령 지배하게 되면서 전리품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1858년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종식되면서 인도박물관은 화이트홀 인도성의 한 부서로 편입되었다. 1875년에는 사우스켄싱턴의 한 건물로 이전되었다가 1879년 인도박물관이 폐관하면서, 일부를 제외한 컬렉션 대부분은 사우스켄싱턴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아마라바티(Amaravati) 조각과 수서본 등은 영국박물관으로, 자연사 표본은 자연사박물관과 큐가든 왕립식물원으로 이전되었다. 인도박물관이 폐관한 후 인도성 지하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유물들이 사우스켄싱턴으로 옮겨왔을 때, 초대 관장 헨리 콜(Henry Cole)은 감격에 겨워 “인도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데 사우스켄싱턴박물관 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6)라고 말했다.  현재 1층 전시실에서 인도관은 중국관, 일본관과 함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인도의 여러 신들을 표현한 석상, 불상, 스투파(탑)은 거대한 규모 때문에 관람자를 압도한다. 하지만 거대한 유물보다는 작은 유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관람자라면 인도산 수직물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대박람회 개최장이었던 수정궁(Crystal Palace) 축소모형이 놓여있는 1851년 대박람회 갤러리에는 인도산 직물이 있다. 지금 당장 유리 케이스에서 꺼내 둘러 입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문양과 질감이 아름답고 세련됐다. <1851년 대박람회 전시실과 수정궁모형> 사진: 염운옥 <1851년 대박람회 전시실 인도산 직물> 사진:염운옥  이 아름다운 인도산 직물은 대박람회에 전시되었던 것으로 이후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의 중요한 소장품이 되었다. 대박람회는 메트로폴리스와 주변부, 식민본국과 식민지, 영국과 인도의 차이를 가시화하는 장치였다. 영국은 인도라는 이해하기 어렵고 상대하기 벅찬 동양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인도는 영국이 지배하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문명의 발상지이며 영국보다 더 오래된 문명의 역사를 간직한 인도. 이를 대하는 영국의 시선은 매혹당하면서 동시에 경멸하고, 찬양하면서 또한 폄훼하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인도 공예와 예술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자기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수정궁 인도 전시관에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와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인도의 다양한 물산이 전시되었다. 특히 인도산 면직물과 견직물은 눈길을 끌었다. 대박람회에 출품된 인도산 직물은 극찬을 받았다. 정부는 박람회 전시품 구매 비용인 5000파운드 중에서 4분의 1을 인도 물품에, 다시 이 가운데 65%를 직물 구매에 지출할 정도로 인도산 직물에 관심을 보였다.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는 17세기 이래 유럽으로 들어온 인도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수직기로 짠 인도산 직물은 방직기계에서 대량생산하는 영국산 면직물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문양을 뽐냈다. 인도 직물 디자인은 영국산 혹은 어느 유럽산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으로서 영국의 위상을 과시하려던 박람회는 역설적이게도 영국산 제품 디자인이 식민지 인도보다도 뒤떨어진다는 쓰라린 패배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실패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취했던 건축가와 예술가, 장식전문가들은 인도산 직물을 ‘올바른 원칙’에 입각한 ‘올바른 디자인의 전형’이며 영국 제조업자가 본받아야 할 ‘디자인 교과서’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수집과 전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재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은 세계 최대 인도직물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다. 이 인도 직물 컬렉션은 원래 직물에서 필요한 크기만큼만을 오려 낸 ‘선택’과 ‘삭제’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잔존물들로서 침묵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인도 직물은 ‘상품’ 혹은 ‘인류학적 유물’에서 ‘미학적 감상 대상’이 되었다. ‘사물’(things)을 ‘유물’(objects)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떼어내기(detachment)와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의복이나 숄, 카펫에서 천 조각을 오려 내 견본을 제작하는 과정은 영국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식민지 인도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지배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본래 용도가 있는 의복이나 숄, 카펫 등과 같은 직물에서 수집가의 선택에 따라 특정한 문양이 놓인 부분만을 오려 내는 수집 행위를 통해 직물은 박물관에 놓이는 ‘유물’이 된다. ‘장식예술박물관’이면서 동시에 동인도회사의 컬렉션을 이어받은 ‘식민박물관’이기도 했던 사우스켄싱턴박물관에 전시된 인도 예술은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의 광활한 대지와 인구, 다양한 종교와 문명이 공존하는 복잡성, 극단적이고 무절제해 보이는 풍습은 서구를 매혹시킨 동시에 서구로부터 배척당했다. 이제 좀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순간, 인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문화로 다가왔다. 브라흐마(Brahma), 시바(Shiva), 비슈누(Vishnu), 락슈미(Laksmi) 같은 힌두 신들의 조각상만큼 서구인들에서 매혹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 인도 문화는 없었다.7) 인도양 지역에서 수집되어 인도박물관,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을 거쳐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에 안치된 인도의 유물은 지배했지만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던 인도라는 타자의 거울이었다. 1) 흔히 ‘만국박람회’로 알려진 대박람회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열리는 수많은 산업박람회의 기원이다. 1851년 런던 대박람회는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린 영제국의 번영을 과시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공이 기획한 국가적 행사였다. 박람회장은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이 하이드파크에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이었다. 수정궁은 주철로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유리로 덮은 거대한 온실 같은 건물로서 축구장 18개 면적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팩스턴이 설계한 이 첨단 건축물은 이름 그대로 수정처럼 반짝이는 ‘빛의 궁전’이었다. 2) Jessica Ratcliff, “The East India Company, the Company’s Museum,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Natural History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Isis 107.3 (2016), p. 495. 3) Ibid., p. 502 4) 동인도회사의 운영은 주주총회와 이사회가 실권을 갖는 구조였다. 이사회는 1773년 규제법(the Regulating Act of 1773)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실제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이사회 본부는 런던 리덴홀가 동인도회사 하우스에 있었다. 5) Jessica Ratcliff, “The East India Company,” p. 502 6) Bruce Robertson, “The South Kensington Museum in Context: An Alternative History,” Museum and Society 2-1 (2004), p. 5. 7) Partha Mitter, “The Imperial Collections: Indian Art,” Malcom Baker and Brenda Richardson, eds., A Grand Design: The Art of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New York: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1997, p. 222.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12-26 | hrights | 조회: 259 | 추천: 2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뉴스를 보지 않게 되면서 글을 읽는 일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억지로 책을 펼쳐 보지만 활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무얼 본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이었을까요? 처음엔 스포츠 관련 콘텐츠를 주로 찾아보다가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를 찾게 되더니 요즘은 주로 긴 길이의 연주 음악을 찾아 듣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귀로만 유튜브를 듣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3개월 동안 경조사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일 없이 지낸 것 같습니다. 그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 더 많이 갔었다는 것뿐입니다. 문득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뿐입니다. 오랫동안 벌이 삼아 해왔던 일도 별 볼 일이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특별한 취미도 없으니, 정말 무위도식에 무념무상의 경지는 깊어지기만 합니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수십 년 월급쟁이를 하다가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친구 하나가 저의 근황을 듣더니 “너도 지금 불백 상태구나” 하고 웃었습니다. 불백이라는 말은 ‘불러주면 나가는 백수’의 준말이라고 했습니다. 제법 사업이 자리 잡은 친구는 그 말에 박장대소하면서 “나는 불백인 너희들이 부럽다”라고 했습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친구가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 윤석열이는 맨날 외국에나 돌아다니고...”라고 하자, 그 옆의 친구가 “윤석열의 최대 단점이 뭔지 알아?‘”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귀국이 너무 잦은 것”이라고 답을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출국이 아닌 귀국이 잦다는 그의 말에 모두 웃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후 맛집, 골프, 건강... 뭐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이제는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에 한번 보자는 말에 모두 동의하며 자리를 파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러 역으로 가던 중에 한 친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쓰다가 생계 때문에 글을 접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친구입니다. 한때는 하는 일마다 잘되어 관계된 모든 모임의 비용을 거의 혼자 감당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모임에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된 그 친구는 몇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연말은 연말인가 봅니다. 송년회 참석 확인 문자도 오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전화로 저의 근황을 묻기도 합니다. 물론 통화의 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식사라도 한번 하자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날의 결혼식 모임 이후 어떤 다른 생각이 든 걸까요. 요즘 갑자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느냐’는 다소 의례적인 인사말에 흠칫 놀라 무념무상의 경계가 조금씩 흔들립니다. 머릿속에 점점 생각이 많아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선 책상머리에 고이 모셔두기만 한 책(*)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근황을 묻는 이에게 무념무상의 경계에 들었다고 헛소리로 어떻게든 대충 뭉개보려는 뻔뻔하고 얄팍한 정신머리가 달라질 것도 같습니다. (*) 저자의 서명이 담긴 두 권의 귀한 책을 받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까지 읽겠습니다. 양상우 지음, <감춰진 언론의 진실> 빈곤의 연구팀 지음/조문영 엮음,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2023-12-19 | hrights | 조회: 188 | 추천: 6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현 정권은 임기 초부터 신종 반북 종북몰이 괴담을 퍼뜨리며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고 있다. 특징은 단 하나. 반북 적대와 공포를 자극하며 한국사회를 위축시키며 집권세력의 안위를 도모하고 이에 저항하는 진보민중운동을 거세하고자 하는 것 외에는 단 한가지의 진실조차 없다. 마구잡이식 극우보수 철면피들의 민주파괴, 인권 도륙의 선무당 사람잡기식 반북 종북몰이에 불과하다. 출처: 민주화기념사업회 그러나 한국사회는 야만의 반북 이데올로기 폭력 앞에 숨 멎기 십상이고, 역사의 퇴물로 낙인 된 지 오래고 벌써 영원히 퇴출당했어야 마땅한 극우 광신도들이 반북 종북몰이 칼춤에 장단을 맞추며 열광하고 있다. 집권하자마자 위기에 내몰린 현 정권은 검찰을 우두머리로 국가정보원을 앞장세운 신종 공안탄압을 선보이며 자멸을 재촉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진부한 레파토리의 반북 종북몰이에 열중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정권은 스스로 반민주, 반인권, 반민중성, 반통일성을 은폐하고 기만하기 위해 오로지 대북적대의 틀로써 모든 것을 재단하고  줄 세우고 있다. 잠시 잠깐 범국민적 저항을 잠재울 수 있다는 요행수를 바라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정권의 위기에서 벗어날 구원의 동아줄로 잡고 있는 것이 반북적대의 레퍼토리 밖에 없다. 현 정권과 극우정치세력과 극우언론의 시도 때도 없는 식상한 레퍼토리가 연일 자행되고 있다. 끊어져 가고 있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매달려 안간힘을 쓰며 최후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언제까지 진실을 가리며 국민을 기망할 수는 없다. 양치기 소년의 최후를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탓인지 쓸 데 없는 짓들을 날 새는 줄 모르고 반복하고 있다. 소위 ‘창원 간첩단’ 조작 사건, ‘제주 간첩단’ 조작 사건 등에서 ‘재판지연’ 운운하는 종북 소동이 끝 간 데 없이 진행되어 왔다. 1년째 끊임없이 온갖 종북몰이를 당해온 양심수들과 그 가족 및 변호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논거도, 이유도 없는 신종 종북몰이의 파렴치함에 분노를 쌓아나가며 차분히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그동안 검찰의 종북몰이에 위축되어 온 사법부조차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피고인들의 불구속 재판의 원칙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조건을 단 보석허가결정을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종북몰이의 대상으로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 간첩들의 재판지연 전략에 농락당하여 보석을 허가해 간첩이 공개적으로 활개치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 사법부에 대한 종북몰이 죄책으로 공공연히 주창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어처구니가 없는 종북몰이 대소동이다. 공안검찰이 ‘재판지연’ 운운하는 종북몰이 괴담의 유포에 앞장섰다. 민주적 사법질서에서 개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법이 보장하는 권리행사를 통해 불구속 재판이 허용된 것조차 국가보안법 사건의 양심수들과 그 변호인들의 재판 지연 술책에 사법부가 놀아났다고 선동하는 세력이 활개치고 있다. 역사의 후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법부마저 종북몰이 대상으로 삼아 피고인의 이익을 위한 신속한 재판을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적용하도록 사법부를 강요하며 겁박하는 지경이다. 법치주의와 공익을 대변하는 검찰이 극우언론과 함께 현 정권의 위기탈출을 위해 사법부의 독립을 침탈하는 반민주적 행태를 버젓이 공개적으로 일삼고 있다. 양심수들이 온갖 종북몰이 소동에 정면으로 맞서 헌법과 민주적 사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는 반면, 검찰독재정권의 ‘재판지연’ 운운 종북몰이 압박 소동에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사법부가 안쓰럽다. 피의자, 피고인을 위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은 우리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양심수들에게 신속하게 유죄를 선고할 것을 사법부에 강요하는 극우보수세력의 유죄추정의 선입견과 종북몰이 여론이 이토록 횡행하는 나라에 민주적 사법질서가 온전히 보장될 리가 없다. 민주시민은 누구나 주소지에 가까운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기에 양심수들은 주소지에 가까운 곳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관할이전신청을 했다. 양심수들은 종북몰이용 피의사실 유포죄를 자행하는 국정원을 고발할 권리가 있다. 또한 사법의 민주화를 위한 국민주권주의의 실현이 목적인 국민참여재판을 통하여 위헌악법 국가보안법 적용의 문제점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는 권리는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민주시민의 권리이다. 양심수들이 제반 권리를 행사하였다고 이마저 재판지연 전략이라고 종북몰이 대상이 되어 비난받는 것은 기본권 보장을 위한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국민에게 보장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고, 공안검찰의 유죄추정의 막무가내 민주적 사법질서 파괴행위에 저항하여 당당히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비밀 밀실 재판에 반대하여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요구하며 언론사 기자들이 취재하는 법정에서 당당히 재판을 받고자 정당한 권리행사를 줄곧 행사한 것에 대해 이를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바로 기본권을 부정하는 헌법파괴세력이고 민주적 사법질서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법정은 극우적 시각의 공안에 길들여진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국가보안법에 압도되고 공안검찰의 종북몰이에 취약한 기회주의적 나약한 사법부의 불공정 재판 진행에 맞서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고 더욱이 재판의 파행을 감추기 위해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한 것에 대하여 고위공직자비리수처에 재판부를 고발까지 하였다. 민주적 사법질서의 수호를 위한 공익과 대의를 위해 구금기간의 장기화에 굴하지 않고 우리 양심수들은 변호인과 함께 싸웠고, 그 과정에서 기피신청 및 고발을 당한 바로 그 재판부마저 더 이상 법에 따른 최소한의 양심적 판단을 지체할 수 없기에 보석을 허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사건의 진실이다. 불구속재판은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고 우리 양심수들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통해 보석허가를 뒤늦게 쟁취하였을 뿐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지연되고 지체되어 실현된 보석허가결정에 대해 민주시민에 대한 불구속 재판의 원칙 보장 입장에서 나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와야 정상적 사회다. 그러나 거꾸로 작금의 상황은 양심수에 대한 법 적용의 불공정성에 아랑곳없이 온갖 유죄추정의 악의적 기사가 연일 언론을 도배하며 극우보수정권의 종북몰이 망동을 합리화시켜주는데 활용되어온 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이라는 이유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야 한다면 민주적 사법질서의 발전은 결코 이룩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발전을 길을 따라 지속적으로 전진할 수 없고 종북몰이 소동이 발호하는 순간 언제든 퇴보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항존하고 있다. ‘재판 지연 술책’ 운운하며 종북몰이 괴담을 퍼뜨리는 공안검찰에 묻는다. 그동안 기피신청 재판부를 대신하여 재판부의 공정성을 옹호하는 궤변의 의견서를 제출할 때는 언제이고, 지금 와서 뒤늦게 보석허가결정을 한 재판부의 결정에 항고하며 재판부조차 종북몰이의 먹이로 집어 던지는 것인가. 국가기관이 국가기관을 종북몰이 대상으로 삼는 나라를 삼권분립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파렴치한 행태를 일삼는데 어찌 이성과 상식을 가진 법치주의 국가의 정상적 검찰의 행태로 보아줄 수 있겠는가. ‘재판 지연’ 운운하는 신종 종북몰이 소동을 낳은 진앙지는 결국 국가보안법이고 대북적대의 분단냉전구조이다. 민주적 사법질서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서도 국가보안법 폐지와 분단극복은 시대적, 역사적 과제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12-13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4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랜만에 역사학계 동료 한 분에게 전화가 왔었다. KBS ‘역사저널 그날’이 살아있다고, 출연해달라고. 줄곧 진행을 맡고 있던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된다고 하였다. 일기에서 확인한 날짜는 2017년(정유년) 9월 어느 날이었다. 2016년 가을,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났고 우리는 언 손을 녹이며 겨울내내 촛불을 들었다. 2017년 3월에는 박근혜를 파면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고, 5월에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이런 일들이 KBS ‘역사저널 그날’을 되살렸으리라. 희망, 그렇다, 약간은 흥분된 희망이 사회에 넘실댔다. 다시 시작하는 ‘그날’의 주제는 ‘조선의 언론’으로, 2회에 걸쳐 방영하기로 했다. 진행자는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했다. 자막에는 ‘목숨을 걸고 외친 한 마디’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한 마디는, ‘아니되옵니다’였다. 국왕에게 목숨을 대놓고 직언하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경험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대간(臺諫), 즉 사간원과 사헌부를 포함한 조정의 신하가 언론을 담당했던 역사를 조명하면서, KBS가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고자 했던 다짐이었으리라. 탄핵 때 언론의 힘이 컸다는 패널의 말도 이어졌다. 나라와 사회가 어려울 때 언론이 했던 역할도 강조되었다. 진행자는 “그런 전통을 KBS가 이어가야 하는데요!”라고 말을 받았다. 그때 내가 대본에 없는 말을 했다. “앞으로 잘하셔야죠!” <내가 캡쳐한 게 아니라,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이 광고로 내보낸 컷이다. 그들의 다짐이자 포부였을 것이다.> 6년이 지난 지금, 공영방송 KBS는 이상한 과정을 거쳐 임명된 박민 사장은 난데없이 ‘편파방송 사과’를 하고, 1980년대 ‘땡전뉴스’를 생각나게 하는 ‘땡윤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몇몇 기자는 퇴사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기자들은 뭐하느냐는 기대 섞인 원망도 나오나보다. 그럴만도 하다. 나부터 한참 지난 KBS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는가! 그래선지 친구가 말했다. 왜 이렇게 잠잠하지? 사람들이 말이야. 왜 조용한지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시민들이 좀 멍한 거 아닌가 싶다. 윤석열 정부는 참으로 다채롭게 보여준다. 총독부가 부활한 듯한 대일 굴욕 외교, 법인세 인하로 인한 세수 펑크, 그에 이은 복지 및 연구 예산 삭감, 검찰 권한의 오용과 남용부터, 언론을 시녀로 만들거나 사유화하려는 시도, 용산이나 오송 참사에 대한 부실 대응, 인터넷 최강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행정정보망 먹통, 휴전선 지역의 충돌을 예방했던 9.19군사합의 효력 정지 ……. 지난주만 해도 근거 없는 엑스포 유치 예상에 대한 허탈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 부인 김건희가 고가의 가방을 받고 인사에 간여하는 보도가 나오는 판국이다. 확실히 역대 어떤 정부도 못하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건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니 국민들이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폭정이나 억압에 대해 민심이 조용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두 이론이 있다고 한다. ‘두꺼운 분석’과 ‘얇은 분석’. 앞의 것은 폭정의 논리를 내면화해서 기꺼이 동조하는 것으로 흔히 헤게모니론이라고 한다. 뒤의 것은 ‘어쩌겠나, 그래도 살아야지’ 하면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순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두껍고 얇다는 말은 뼛속까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차이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설명 역시 상황을 더 뜯어보기는 했지만, 죽창 드는 농민, 파업에 나서는 노동자, 촛불 드는 시민을 설명하지 못한다. <시민의 정치 공간, 선술집. 저기서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는 저 사람들만 안다.> <드라마 촬영 중. 저들은 중전마마 또는 PD의 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특히 ‘무슨 말을 하고 있어?’ 하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예요’라고 대답한다면 100%!> 그래서 나는 동조와 순응의 밖에 존재하는 무수한 정치공간에 주목한다. 모바일 소통방에서, 인터넷 카페에서, 버스 안에서, 점심 밥 먹으며, 퇴근 후 한 잔 하며 친구나 동료들과 나누는 작금 정치 행위에 대한 농담, 경멸, 불평, 불만, 불안, 비웃음……. 때론 맘 맞는 사람들끼리라면 술김에 세상을 엎어버릴 듯이 호언을 해도 좋다. 푸념, 호언처럼 들리는 그 두런두런, 수군수군 속에 시민의 정치의식은 보존된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위로, 가능성, 희망이 있다. PS. 1) 나라꼴이 이런데도 아직 30%나 지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화내는 분들이 있다. 그릇된 현실에도 그걸 초래한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 인지부조화는 초래한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화낼 에너지는 내 속에는 인지부조화가 없는지 돌아보는 데로 돌리는 편이 좋겠다. 2)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눈 뜨고 보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난 우선 3년 반이라고 고쳐준다. 그리고 연산군 15년, 광해군 15년, 식민지 40년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위로 안 되는 사료를 알려준다. 당시는 텔레비전, 라디오가 없어서 그 꼴을 매일 듣고 볼 일이 없었으므로 나의 위로는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3) 1980년 전두환 쿠데타를 다룬 ‘서울의 봄’이 흥행이란다. 특히 MZ 젊은이들이 많이 본다고 한다. 다행이다. 나는 이번에 보지 않을 생각이다. 1980년대보다 더 1980년 같은 지금, 그 기억을 소환하기엔 아직 버겁기 때문이다. 좀 더 세상이 좋아지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나면 그때 볼 생각이다. 감독, 배우, 스텝들께 역사학자로서 고맙고, 관객으로서는 미안하다는 인사 전하고 싶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12-04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14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함석헌 선생(1901~1989)> 출처: 한겨레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위대한 실천적 사상가이다. 민중 지향의 개혁적 실천가이면서 동서양 사상의 깊이를 두루 꿰뚫은 영성적 깊이마저 갖췄다. 그의 말은 깊은 데다 힘도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의 말은 인구에 회자되기도 한다. 그는 말한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합니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충분히 옳은 답으로 이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새처럼 복잡한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 한계도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생각의 내용은 다르지만, 저마다의 생각이라는 ‘형식’은 같다. 지배자도 저마다 생각하며 산다고, 저마다 사태를 뚫어본다고,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생각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사상적 맥락에서 보면 권위적 독재자는 사실상 ‘생각 없는’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독일의 탁월한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현실을 많이 생각하며 나치즘을 옹호했다. 일본의 천재적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그 엄밀한 논리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주의 세계관의 정점인 황실을 옹호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나름 고민하면서 친미를 근간으로 삼았고, 대화를 통한 통일주의자를 반공주의자로 정죄했다. 많은 ‘민중’이 이승만을 지지하며 통일 정부가 아닌, 단독정부 수립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박정희 찬양론자들도 나름 생각이 있다. 출처: 조선일보 생각만 그렇던가. 함석헌은 자유를 대단히 중시했다. 억압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와 같은 선구적 실천가들 덕에 민중은 정치적 자유를 상당 부분 획득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에는 지배자들도 자유를 내세운다. 진보적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 자유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 계열의 자유 못지않게 ‘국민의 힘’ 계열의 자유, 심지어 ‘우리공화당’이나 ‘전광훈’ 부류가 내세우는 극우적 자유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한 지 1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 494번이나 자유를 내세웠다.(한겨레, 2023.05.05.) 주로 시장, 기업 중심의 자유였고, 반공·친미·친일적 자유였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민중이 이런 자유론을 지지한다. 자유는 자유이되 함석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지배층 중심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유를 마음대로 물리칠 수는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은 의사전달과 표출방식이 대단히 다양해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소식만 골라 듣고 공유하고 일방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도리어 더 쉬워졌다. 자유도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 부류의 자유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응해 대통령을 긍정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대통령을 비판하면 나는 대통령을 더 편들겠다’는 식이다. 함석헌도 이런 모순적 원리를 파악하고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진다면 유일의 길이 사상을 자유롭게 하는 것. 좋은 사상이 나오려면 나쁜 사상을 해도 간섭 안 해야지.” 이어지는 문제는 ‘나쁜 사상’에 간섭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서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럴수록 ‘나쁜 사상’끼리 더 단결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더 크게 외친다. ‘좋은 사상’을 만들기 위해 ‘나쁜 사상’에 간섭하지 않는 사이에 지배자 중심의 자유가 피지배자 중심의 자유와 등가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양극화는 지속되고, 자유의 이름으로 서로 대립하는 데로 나아간다. 무엇을 위한 어디로부터의 자유이며,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람’은 민족, 국가, 신분, 계급을 넘어선 보편적 개념이다. 피지배계급을 수단화하지 말고 사회적 약자도 동일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형식과 논리에 따라 어느 진영에서 “함석헌이 사람”이듯이, “이승만은 사람이다”, “박정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결국 ‘사람’끼리 충돌한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흑인 인권운동이 “백인의 생명도 중요하다(White lives matter)”는 백인 중심의 대응 논리에 의해 묻혀버린다. 사회적 약자의 소리마저 힘의 논리 앞에 묻힐 뿐만 아니라, 질서를 무너뜨리는 폭력적 언사라도 되는 것처럼 왜곡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로 가고 있는 것도 이런 대응적 목소리들이 저마다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평화와 관련지어 보면, 누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는 얼마나 ‘비폭력적’으로 움직이느냐로 나타난다. 함석헌에 의하면, 불의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 ‘생각함’의 증거이다. 저항하되 가능한 한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든든한 주체성과 고도의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정신이 방향을 안내하고 인도한다. 함석헌에 의하면 이것이 새로운 종교이자 도덕의 기초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긍정하면서 전체를 살리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의 비폭력은 좁은 의미에서 물리적 폭력을 쓰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단박의 체제 전복으로 가지는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살금살금’, ‘옴질옴질’ 먹어나가는 혁명의 길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민중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천천히 잠식(蠶食)하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잠식해가며 잠깐의 고통을 견뎌내는 세력을 그는 씨알이라 부른다. 씨알은 지배에 잠식당하지 않고 지배를 잠식한다. “지배에 ‘잠식’당하지 않고 지배를 ‘잠식’하는 이가 씨알”이다. 비폭력적 손해를 통한 ‘잠식적’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힘이 씨알이다. 씨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씨알이다. 모든 불평등과 부자유와 억압을 차근차근 잠식해가는 움직임이 씨알이 존재하는 증거이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양극화를 극복해가는 것이 씨알의 증거이다. 씨알이라는 구체적 실체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폭력적으로 부자유를 고발하고 모든 불평등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씨알의 증거이다. 함석헌이 4.19와 5.16을 대조하며 4.19편을 들었던 데서 씨알의 실질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 5.16은 ‘자기주장’, ‘내가, 내가, 내가 한다는 것’, ‘쥐고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것’, ‘섬김받자는 것’이라면, 4.19는 ‘(내가 아니고) 우리가 살자는 것’, ‘섬기자는 것’, ‘바치자는 것’이다. 그래서 씨알의 정신과 자세는 ‘여물고’ ‘떨어지고’ ‘썩는’ 것이다. 물론 여물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생각을 하는 것은 여무는 일입니다. 나무의 열매가 햇빛을 보아야 여물듯이, 씨알은 생각을 해야 속알이 여뭅니다.” 이쯤 되면 씨알은 그냥 주어져 있는 어떤 개인이나 세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씨알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 ‘우리’, ‘섬기기’, ‘바치기’, ‘여물고’ ‘떨어지기’, ‘썩기’... 정말 어려운 과제들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 없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씨알은 좁은 의미의 계급 언어가 아니다. 내면적 훈련, 사회적 참여, 정치적 혁명 등을 두루 엮어 드러내는 힘든 길이다. 당연히 혁명은 어렵다. 그래도 함석헌의 씨알론을 다시 읽으며, 생각이 상대화되고 자유가 오남용되는 현실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데서 희망을 보고 힘과 위로를 얻는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11-27 | hrights | 조회: 324 | 추천: 7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생, 뭐 별거 있냐!”라고 말하는 이들을 가끔 본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조차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그들이 보기에, “도대체 인생이란 게 뭔가?”라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려는 사람은 ‘별난 인간’이다. 그러나 역으로 ‘별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이야말로 허망한 인생이고,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삶은 (현상적으로는 살아도) 참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할 법하다. 삶에 의미가 없다면, 나날의 삶은 그저 세월 보내기에 불과한 게 될 테니까. 출처: Raiyan Foundation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만 ‘세월이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려는 의식이 먼저 있어야 실제로 참되고 바람직한 인생이 가능하다고 보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미를 묻고, 그것을 알고(知) 싶다는 의식이 없다면, <참다운 삶>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 대표적 철학자가 헤겔(G. W. F. Hegel, 1770~1831)이다. 그는 한 개인의 이력(履歷)만이 아니라 세계의 내력(來歷)에 대해서도, 그것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역사의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 있다고-“세계사 자체를 고찰(의식)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세계사가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출처: INDEPENDENT    삶 그 자체가 개인에게 자신의 의미를 말해주거나 보여주지 않듯이, 역사적 사건들도 인간에게 역사의 의미나 목적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생각이 먼저 있어야만 역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다. 만일, 역사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역사를 그저 피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아무런 인과관계나 필연성도 없는, 그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잡다한 사건들의 진열장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것 속에 감춰져 있는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피상적 관찰이 아니라 근본적 고찰을 한다면, 역사의 참된 모습과 의미를 볼 수 있다. 헤겔은 현상들에서 본질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안목(눈)을 “사유적 고찰”이라고 불렀다.    사유적 고찰을 통해 현상들 속에서 본질을 찾아낸다고? 비유를 써서 설명하자면, 헤겔에게 세계의 역사란 심오한 사상이 담긴 일종의 거대한 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숱한 문장들이 있고, 거기에 저자가 피력하고자 하는 핵심 논지와 집필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저자의 논지가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책도 있다. (물론 명시되어 있지만 독자가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뛰어난’ 독자라면 독서를 하면서 쉬 드러나 있지 않은 저자의 의도와 논지를 찾아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도 수많은 구체적, 경험적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는 곧바로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의도와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 숨어있는 것들을 파악할 때, 비로소 역사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세계를,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이념이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신의 의도(목적)와 본질을 실현해 나간 산물로 파악하는 태도가 소위 ‘관념론’이다. 정신이 일차적이고, 물질은 정신으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 근거가 되는 정신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에 접근하는 헤겔의 기본적 태도다. 헤겔은 정신이 역사를 규정한다는 주장이 자의적이고 주관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고찰한 사유의 산물로써, 역사적 사실들에 의해서, 또 그것으로부터 능히 논증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대학에서 ‘역사철학’을 강의했다.   우리가 최인훈의 <광장>은 그의 문학정신의 발로(發露)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예술정신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처럼, 헤겔도 예술정신과 예술작품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이념과 세계도 별개의 무관한 게 아니며, 정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비로소 물질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프랑스혁명 이념의 구체적 표출이기 때문에, 혁명이념인 자유 정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혁명 자체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출처: 미래일보   헤겔이 ‘역사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이성의 오디세이’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여기에는 객관적 역사 자체가 이성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역사란 절대로 무(無)의미하지 않고, 충분히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만일 역사가 이성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면, 인간의 역사적 삶은 거짓과 기만, 혼란과 무질서, 폭력 따위로 얼룩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활용하여 과거 역사를 반성하고,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달함으로써 역사가 진(眞), 선(善), 미(美)의 도살장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역사 속에서 숱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을 겪으면서도 사회제도와 공동체의 관습을 합리화하면서 모든 인간의 가치와 권리가 평등하고 저마다의 자유가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런 인간의 노력이 시대를 거치면서 세대로 전승되고 누적되면, 인간 세계와 역사는 점차로 이전 시대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윤 정권하에 살다 보니, <외면적 현상만 보는 사람에게 역사는 그저 가장 추악한 것들이 날뛰고 있는 무의미한 회의와 실망의 난장판이지만, 내재적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역사는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고, 더 합리적이고 나은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무대>라는 철학자의 말에서 따뜻한 위로를 구하게 된다. 이 간난(艱難)한 주술의 세월도 필연코 엄정(嚴正)한 이성의 역사가 되리라!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11-14 | hrights | 조회: 407 | 추천: 12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9·19 남북군사합의가 5년 만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정부에선 틈날 때마다 군사합의 때문에 안보위협이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국방부는 군사합의에서 규정한 비행금지구역 탓에 우리 군의 대북 감시·정찰에 구멍이 생겼고, 도발 징후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출처: 뉴시스 9·19 합의에 따라 남북은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고정익항공기는 동부와 서부 각각 40㎞와 20㎞, , 무인기는 동부와 서부 지역 각각 15㎞와 10㎞, 회전익항공기는 10㎞, 기구는 25㎞를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이를 문제삼는 이들은 유사시 휴전선 인근에 배치된 300여문의 조선인민군 장사정포가 최대 위협인데 이를 감시정찰하는데 제한이 되는 바람에 임박한 도발 징후를 포착하기 어려워 선제 타격이 여의치 않다는 논리를 편다.  가장 앞장서서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주장하는 신원식(국방부 장관) 말을 들어보자. 그는 지난 10월 11일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대화력전수행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9·19 군사합의로 인해 대북 우위의 감시정찰 능력이 크게 제한됐고, 국가와 국민의 자위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9월 25일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낸 답변서에서도 “9·19 군사합의로 인한 군사적 취약성이 매우 많다”면서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대북 감시정찰 능력 저하 및 근접정밀타격 제한’을 첫 번째 근거로 꼽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심각한 안보위협이라면 2018년 군사합의 체결 당시는 물론이고 그 뒤 몇 년 동안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군은 도대체 뭘 했다는 말인가. 전 세계에서 열손가락 안에 든다는 대한민국 국군이 설마 지난 정부에선 잠만 자다가 정권교체되자마자 ‘에구머니나’ 하며 일을 열심히 하려고 봤더니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걸 알게 됐다는 의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군사합의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정경두(전 국방부 장관)는 “정찰기 띄워서 눈으로 적군을 살피던 시대라면 비행금지구역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은 21세기”라면서 “우리 군과 주한미군은 비행금지구역을 무시해도 될 수준의 최첨단 감시정찰자산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행금지구역 자체는 군사합의 이전부터 존재했다. 유엔사에서는 군사분계선 남쪽 5마일을 기준으로 비행금지구역을 운영해왔다”고 덧붙였다. 현직 군 관계자에게도 물어봤다. 그는 “현재 군에서 보유한 공중정찰자산은 충청남도 상공에서도 북한 전역의 항공기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서야 안심이 됐다. 대한민국 국군은 잠자는 숲 속 공주는 아녔나 보다.  신원식의 주장 자체가 ‘육군 중심 사고방식’이라는 비판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비행금지구역에 초점을 맞추는 건 전형적인 육군, 그것도 20세기 육군 사고방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비행금지구역으로 인해 감시정찰에 영향을 받는 건 사실상 육군에서 운영하는 무인기 ‘송골매’ 정도밖에 없다. 송골매는 정찰 가능 거리가 5㎞가 채 안된다”면서 “군사합의 이전에도 송골매는 감시정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행금지구역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한강하구부터 백령도에 이르는 지역은 적용대상이 아니다”면서 “그 지역은 공중정찰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부러 군사합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육군 무인기 송골매> 출처: 머니투데이 비행금지구역 문제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어떻게 보는지도 중요하다. 2018년 군사합의 당시 국방일보는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판문점 선언 이후 9·19 군사합의 체결을 위한 남북장성급(실무)회담 개최 전후 유엔사 및 주한미군 측과 수십 차례에 걸쳐 고위급 및 실무급 차원의 긴밀한 협의를 진행했다”면서 “특히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을 포함한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상호 적대행위 중지 관련 내용은 남북 간 최초 논의단계부터 유엔사 측에 정보공유 및 의견수렴 과정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다행이다. 주한미군 역시 잠만 자고 있진 않았다. 역시 한미동맹은 철통같다.  출처: 동아일보 9·19 군사합의는 NLL이나 휴전선 등에서 남북 간에 우발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군사합의를 효력정지시키면 어떻게 우발적 충돌을 관리한다는 것일까. 정부가 생각하는 대안은 뭘까. 없다.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도발에는 응징이 있을 뿐이다. 압도적 화력으로 확실히 응징하고 끝까지 응징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응징하면 북한도 더 강하게 나오고, 그럼 진짜 전쟁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군은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전시작전통제권이 없기 때문이다. 권한이 없으면 책임도 없는 법이다.  권한이 없으면 책임도 없는 법이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11-07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