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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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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흔드는 국가보훈처(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6-10 18:06
조회
2072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혁신했던 보훈처


 국립묘지나 군인이 떠오르던 국가보훈처가 내 관심의 언저리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2017년, 5.18 하루 전날, 피우진 중령이 장관급으로 격상된 보훈처 처장으로 임명될 때였다. 대위 시절, 여군 부사관을 술자리로 불러낸 상관의 명령을 받자, 전투복을 입혀 보냈다는 일화로 알게 된 분이었다. 그 일로 피우진 중령은 내게 대장 같은 중령으로 다가왔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부르지 못하게 했던 일을 기억하기에 피우진 중령의 보훈처장 임명은 시대 변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국가보훈처는 시대에 걸맞은 변화를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2018년, 안팎의 힘을 모으기 위해 조직된 것이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였고, 거기 참여하여 부족한 역량이나마 보탤 수 있었다. 보훈처의 혁신 과제를 정리하고 그걸 보훈처 담당자들과 협의하여 개선 방향을 찾아나가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외부의 시선을 가진 혁신위원들은 전임 보훈처장이었던 박승춘으로 대표되는 보훈처의 이미지를 아직 씻지 못하였고, 보훈처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혁신위원들에게 경계심이 역력했다. 하지만 혁신위원들은 한 나라에서 보훈이 사회적 가치와 비전을 담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직원들은 보훈처 혁신이 그들의 자긍심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국방부 소속기관 같은 환경에서 꾸준히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분들과의 결합도 긍정적 에너지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곪은 부분을 도려낼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잡아나갔다.


 혁신위원들과 내부 직원들의 노력으로 1) 보훈처 위법 및 부당행위 재발 방지, 2) 독립운동 보상과 예우, 3) 공정성과 형평성 강화, 4) 보훈처 위상과 역량이라는 4부문에서 권고안을 만들 수 있었다. 보훈처 혁신위가 가졌던 비전은, 역사, 기억, 나라, 독립, 민주, 사회공헌 등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 권고안에 따라 국가보훈처에서는 자체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2018년 12월이니, 혁신위원회 출범 6개월 만에 이끌어낸 협치의 결과였다.


 그 무렵 나는 중국 연변대학으로 갔다. 혁신위원회도 권고안을 낸 뒤, 전문성을 강화한 정책자문위원회로 바뀌었다. 이어 2019년 8월, 보훈처 장관은 피우진 처장에서 박삼득 처장으로 바뀌었다.


고민 없는 발언이 뭉갠 기념사


 지난 6월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군 한 분 한 분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임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미래를 열어갈 힘을 주는 일”이라며 “코로나 때문에 늦어졌지만, 정부는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올 것이다.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2018년 3월 육군사관학교에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세워졌다. 이는 애국이라는 가치를 친일-반공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의 독점에서 독립-민주 세력의 손으로 넘겨온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그 의미와 비전을 이어 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유해의 귀환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 며칠 전인 5월 28일. 박삼득 보훈처장은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를 찾았다.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을 주장하는 주호영 대표에게 박삼득 처장은 “백 전 장군의 일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이냐 대전현충원이냐 이런 것인데, 서울현충원 묘역은 만장 상태다. 우리는 서울현충원 간다, 못 간다 이게 아니라 대전현충원에 모실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백선엽의 안장 여부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촛불혁명으로 취임한 대통령이 취임 당시부터 보훈의 개념을 ‘독립-호국-민주’로 확장하였다면, 보훈처장의 발언 역시 그 연장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대통령 기념사와 박 처장의 발언 사이에 심각한 괴리를 느끼는 게 나 혼자만의 불안감일까?




65회 현충일 추념식 모습
사진 출처 - KBS


간신(奸臣)이 있다


 박삼득 처장은 취임 이후 정책자문위원회를 무시했다. 정책자문위원회가 전직 처장이 만든 임시조직이었으니 그대로 둘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걸까? 겨우 중령 따위, 혹은 여자가 만든 자문위원회니까 별 셋 출신인 남자로서 구속받고 싶지 않았던 걸까? 나아가 박삼득 처장은 전임 피우진 처장이 불법조직으로 규정한 ‘나라사랑공제회’에 대한 해산절차를 밟기는커녕 나서서 사업설명회를 하고 다녔다. 재향군인회의 투명성과 민주성 제고를 위한 혁신방안을 실행하기는커녕 상조회 부실 매각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혁신위와 보훈처가 합의한 권고안의 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코로나19 탓이라고 했다.


 누구는 보훈처장이 아니라 재향군인회장 같다고 말한다. 누구는 국가보훈처라고 부르지 말고 국방부 보훈국이 좋겠다고 말한다. 혁신위원의 말이 아니라 보훈처 직원의 말이다. 혁신에 희망을 가졌던, 앞으로 오래 보훈처에 근무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직원들 말이다.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사회에 떳떳하고 싶은 직원들 말이다.


 국가보훈처에는 할 일이 쌓여있다. 새로운 시대의 보훈 개념에 따른 정책이론과 조직 구성 재편, 복잡한 보훈체계의 주도적 정비, 그에 따른 국내외 자료 조사, 민주사회에 걸맞은 보훈교육의 개발, 사적 이익이나 정치적 이해에 동원되었던 산하 기관의 정비와 정상화,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국가보훈처가 우리 사회의 가치와 정의를 상징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는 것이 그것이다.


 중앙행정기관의 기관장은, 한 정부의 장관급 각료는 책임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분은 말한다. 이런 국가보훈처의 현실은 사리사욕에 오염되지 않은 보훈 정책, 촛불로 탄생한 공정-민주 지향의 정부에 불길한 조짐이라고. 일리가 있다. 능력과 비전이 없이 장관급 보훈처장을 맡으면 안 되며, 그런 사람이 자리를 넘보아도 맡겨서는 안 된다. 선거캠프의 자문위원이라는 경력을 빌미로 삼아 능력과 비전이 없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보훈의 미래에 대해 대통령과 상반되는 가치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수레바퀴에 깔리는 건


 이런 인사가 걸러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운영에 긴장감이 풀어진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부패나 불의보다 나라와 사회에 해로운 것은 긴장감 없는 해이함이다. 해이함이야말로 모든 해악이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대개 그 통로를 만드는 것이 간신(奸臣)이다. 그런 점에서 현 보훈처장을 대통령에게 천거한 측근이야말로 간신이다.


 조선시대 상소문에서 그토록 ‘상벌을 신중히 하라[愼賞罰]’고 강조한 뜻을 몰랐다. 이것이 한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동안 나는 국가보훈처와 ‘신상벌’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렇다고 국가보훈처의 비틀거림과 해이함이 현 정부의 ‘불길한 조짐’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보훈처 혁신위, 정책자문위에 참여했던 분들은 보훈처장의 무관심과 상관없이 포럼을 만들어 보훈 혁신 과제를 탐구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사회의 흐름으로 보아도, 이 땅의 시민들은 이미 그런 해이함을 두고 보지 않기 시작했다. 명실상부하게, 시민이 주인인 시대가 왔다. 이 말은 나라를 시민들이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이 나라, 이 역사, 우리가 이끌어갈 것이다. 도도한 수레바퀴에 깔리는 건 사마귀만이 아니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