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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경제라면서(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2-19 18:23
조회
366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평화가 경제라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들어가기 전부터 “평화가 경제”라는 말을 해왔다. 더불어민주당도 곳곳에 “평화가 경제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집권당으로서 청와대와 동행한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평화로 경제를 살린다니 좋은 얘기다. 그런데 정작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설은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려온다. 남북간 교류를 통해 한반도에 긴장이 완화되면 투자가 늘어서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는 메시지 정도로 해석되기는 한다. 국민이 그 정도로만 해석해도 큰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평화 보다 안보가 우선이며 평화가 경제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즉 경제가 평화라는 대응적 목소리도 크다. 평화라는 말만 같을 뿐, 같은 말로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무엇이기에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국민적 공감대를 더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가 발전되어야 따라오는 평화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평화라는 말만 하지 말고, 무엇이 평화인지, 어떻게 평화를 이루는지 웬만큼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요사이 평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마당에 정말로 평화가 경제이기를 바라며 평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설부터 좀 해보련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흔히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일견 그럴 듯한 정의이다. 하지만 인류에게 폭력이 없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의는 비현실적이다. 주먹질이나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 정도만이 아니라,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에 의해 구조화된 폭력, 성차별 같은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적 폭력 등까지 염두에 두면 인간은 폭력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는 기존의 정의는 경험에 따른 정의라기보다는 일종의 희망적 정의라 할 수 있다. 희망적 정의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경험해보지 않은 내용으로 채워진 평화는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희망적 정의를 넘어, 현실을 반영하는 실감나는 정의가 필요하다.
 평화를 ‘폭력이 없는 정적 상태’로서보다는, ‘폭력을 줄이는 동적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폭력을 줄여나가는 동적인 행위가 실제로 평화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다. 현실은 언제나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룬다고 하면서도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고, 자기만을 위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른바 ‘자기중심적 평화들’이 도리어 갈등과 폭력을 부추긴다. 자기중심적 평화들이 충돌하며, 설령 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세상은 자꾸 ‘비평화’로 나아간다.
 인도의 평화학자 다스굽타가 전쟁과 같은 직접적 폭력이 없는데도 평화롭지 못한 상태를 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 표현해낸 바 있다. 우리말로는 ‘평화 없음’ 혹은 ‘무평화’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흔히 ‘비평화’로 번역하곤 한다. 전쟁은 없는데도 평화롭지도 않은 상태를 요한 갈퉁은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는 말로 재구성한 바 있다. 일단은 직접적 또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감폭력의 길


 평화에 ‘소극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실제로 싸움이나 전쟁이 없기를 바라고 실천하기도 벅차다는 뜻이다. 그 정도도 간단하지 않은 일이고, 나아가 귀중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평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실제로 폭력을 더 줄여가는 길에 나서야 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데도 남북이 서로 갈등하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저마다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억압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일종의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나아가 문화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 평화의 단계를 넘어 일체의 폭력이 없는 상태, 즉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평화가 ‘소극적’과 ‘적극적’이라는 두 가지 상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그다지 단계적이지 않다. 여러 상태와 단계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폭력을 방지하며 동시에 폭력을 줄여나갈 수 있어야 한다. 소극적 평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이상의 평화를 지향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 평화의 행위인 것이다. 적극적 평화는 폭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그 폭력이 지금보다 더 줄어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reducing violence)’, 한 마디로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의 과정으로 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타자에게 아픔을 주는 ‘사나운[暴] 힘[力]’이 타자를 살리는[活] 힘[力]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평화이다. 폭력(violence)의 벡터, 즉 폭력의 힘과 방향을 반대로(minus) 이끄는 과정(ing)이다.


아픔에 대한 공감, 폭력 축소의 동력


 폭력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폭력으로 인해 누군가 어디서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 때문에 그 아픔을 보거나 상상하는 이도 불편하거나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픔을 내 안으로 가져오게 되고, 폭력을 줄이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픔에 대한 공감이 평화연구와 운동의 시작인 것이다.
 특히 약자 혹은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아픔의 근원을 통찰하고 아픔을 줄이는 동력이 된다. 성폭력 폭로 운동인 ‘미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다. ‘사나운[暴] 힘[力]’의 피해자가 그 힘을 폭력이라 느끼면 그것은 폭력이다. 평화학도 대체로 이 같은 기준에 동의한다. 가능한 한 약자의 아픔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아픔의 원인에 대해 탐색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평화 연구도 평화 운동도 이러한 공감을 기반으로 하면서 폭력을 줄여나갈 때 진정성을 확보한다.
 폭력을 줄인다는 것은 더 큰 폭력에 대해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해 더 큰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가령 백남기 농민이 경찰차를 흔드는 행동을 했던 것은 전적으로 비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해 거대한 폭력적 권력을 폭로하는 행동이었다. 전적인 비폭력은 불가능한 언어이다. 사람이 고기를 먹는 행위조차 짐승에 대한 폭력의 결과인 마당에 순수한 비폭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큰 폭력을 폭로하는 작은 폭력을 선택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육식을 줄이는 것도 폭력을 줄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큰 폭력 앞에서 일부러 작은 폭력을 선택하다보면 희생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백남기 농민이 그랬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폭로하는 행위를 통해 폭력은 줄어들고 줄어든 그만큼 평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평화는 감폭력이다. 그렇다면 감폭력이 어떻게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말일까. 다소 길어졌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써보련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