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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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쯤으로 기억됩니다.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저에게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이웃 마을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습니다. 선비는 불어난 개울 앞에 멈추었습니다. 그 전날 비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징검돌 몇 개만 밟으면 건널 수 있는 작은 개울이었지만 물이 불어 징검다리는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울을 건너려면 신발을 벗고 바지를 허리춤까지 걷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선비는 신발과 버선까지 벗고 바지를 올리리가 영 귀찮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중에 좋은 꾀가 떠올랐습니다.  개울 옆 길 끝에 장승 두 개가 서 있었습니다. 선비는 장승을 발로 넘어뜨렸습니다. 그러고는 장승을 나무다리로 삼아 밟고 개울을 건넜습니다.   잠시 후에 역시 이웃 마을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선 이가 있었으니 어느 부잣집의 머슴 돌쇠였습니다. 물이 불어난 개울을 건너려던 돌쇠는 기가 막혔습니다. 어떤 못된 인간이 겁도 없이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통나무다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돌쇠는 서둘러 장승을 개울에서 들어 올린 후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신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린 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문제는 화가 난 장승이었습니다. 스스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장승이었는데, 감히 자기 몸을 넘어뜨려 밟고 지나가는 통나무다리로 전락해버렸으니 그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승은 인간에게 벌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에게 무서운 벌을 내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본을 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온몸에 고칠 수 없는 종기가 나서 평생을 고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벌을 받은 사람은 앞서 갔던 선비가 아니라 뒤에 개울을 건넌 돌쇠였습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나 저는 당연히 따졌습니다.   "할머니, 선비가 나쁜 놈이고 돌쇠는 착한 사람인데 왜 돌쇠가 벌을 받아?"   당시 저는 외할머니가 이야기를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당한 결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그게 아닐 거라고 할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끝없이 왜? 왜? 왜? 하고 따지는 저에게,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도 몰라 이놈아. 이야기가 본디 그래!"   '이야기가 본디 그렇다'는 말인즉슨, 외할머니는 당신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야기에서 보태거나 빼거나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저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저는 그 이야기가 문득 떠오를 때마다 선비는 벌을 받아야 할 나쁜 사람이고 그 때문에 돌쇠는 애꿎은 일을 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선비는 가해자, 돌쇠는 피해자쯤으로 정리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둘의 신분이 양반과 노비로 대비되는 만큼 이야기의 결말은 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올해 고등학생이 된 조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장승이 나쁜 놈이네요, 지가 뭔데 벌을 주고 말고 해요?" 
2019-12-19 | hrights | 조회: 1215 | 추천: 5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벚꽃이 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방송은 물론 모든 언론은 벚꽃의 개화일지를 상세히 보도할 것이고 그 친절한 안내에 따라 전국의 도로란 도로, 산이란 산은 벚꽃 천지가 될 것이다. 진해군항제에 쌍계사 벚꽃 길은 인산인해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며 조선신궁이 있던 남산이나 심지어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윤중로도 벚꽃 터널의 황홀함에 비틀거리는 인파로 가득할 것이다. 라디오나 tv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으라”고 분초를 다투어 읊어댈 것이고 몇몇은 일본의 아베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축제를 만들어 사람들의 넋을 홀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벚꽃축제가 200개가 넘어(행정구역상 시, 군의 개수가 161개이니 각 지자체당 1개 이상) 차고 넘치지만 또 만들 것이다. “사쿠라”가 도대체 뭐가 좋다고 저 난리들인가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을지도 모르나 이 여린 빛깔의 향연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죄라는 연인들의 깔깔거림 속에 묻힐 것이다. 조선의 꽃이나 일본의 꽃이나 다 같으니 꽃에게 무슨 이념이 있겠는가를 따지는 이도 있겠고 심지어는 벚꽃은 이 땅에서 난 토종인데 무슨 무식한 소리냐며 핏대를 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박중양이나 윤치호 일가가 한반도 근대화에 앞장선 개화파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도 봤고 심지어 박정희가 독립운동도 했다더라고 우기는 사람도 봤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도 한 사회를 살아간다. 그러니 벚꽃에 관한 해석은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의 몫으로 묻어두고 벚꽃 축제는 영원하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절에 만든 교육칙어(教育勅語 교이쿠초쿠고)를 그대로 본뜬 국민교육 헌장을 달달 외웠다거나 친일파 박정희가 2차 대전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에게 대한민국 1급 훈장(수교훈장 광화대장)을 수여했다거나 1980년대 이전 육군 참모총장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었다거나 하는 철지난 친일청산 미흡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백컨대 일본 자위대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창설 5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을 때(2004.6.18. 신라호텔) 축하하러 간 한국의 국회의원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 중에 재선에 재선을 거쳐 중진 정치인이 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허탈하다. 친일 인맥도가 돌아다니고 누구누구는 친일 거두의 일가라는 말이 낭설이 아님에도 끝끝내 선거에서 살아나 사선, 오선을 하고 수구야당의 깃발을 드는 모습에선 아예 귀를 닫고 만다. 그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일가의 반민족적 과오를 시대를 앞서간 탁견으로 받아들이는 백성들이 그들의 지역구에선 절반이 넘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겐세이” 놓지 말라고 “야지”를 퍼붓는 국회의 모습은 낯설지도 않다.  844,729:7,031 전체 보훈대상자 대비 독립 유공자의 숫자(국가보훈처 2018년 통계) 를 보면 더욱 참담하다. 유관순 선생이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이 일제와 싸워 세운 나라라는 국가 정체성이 고작 0.8%만 인정을 받는 국가기관의 통계 속에서 반공의 깃발은 더욱 드세 지고 그들의 근간이 친일이라는 공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이미 황국신민(國民)이란 말을 대치불가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친일파 윤치호의 작품이라는 의심을 받는 작사와 일제 만주국을 찬양한 작곡가의 음악을 애국가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욱일기의 모태가 된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꽃(경희대 강효백 교수의 주장)이라는 무궁화를 국화로 추앙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른 채 친일 음악인의 친일가요 ‘희망의 나라로’에 환호한다.  사라진 줄 알았지만 여전히 서울대 음악대학 앞에는 현제명의 동상이 버젓하고 중앙대에는 임영신, 연세대 백낙준, 추계대의 황신덕, 고려대의 김성수, 이화여대 김활란 등 좋다는 대학의 교육철학을 설파하는 친일 거두들의 동상은 찬란하다. 식민지 수탈의 아버지, 경부철도 주식회사의 주역 시부사와 에이치(渋沢栄一)는 이미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탈바꿈하여 한국에서 추앙 받은 지가 꽤 되고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소리 없이 올해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그나마 NO아베를 외치며 들불처럼 번진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애들도 안하는 정신병 같은 장난 혹은 북한만 이롭게 한다는 신문사설로 화려한 조명을 받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미가 세탁된 친일은 이미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비중을 늘려간다.  그리고 현 정부의 지소미아 효력정지 해제. 국회의장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1+1+a). 외교, 정치적 함의는 있을 수 있겠으나 내 할아버지가 울분을 토했던(외증조부는 1907년 의병에 가담했고 옥고를 치룬 몇 안되는 독립 유공자이다) 민족적 · 자주 독립적 함의는 전혀 없다.  하여 그들은 다시 온다. 일본 A급 전범 사사가와 료이치의 돈을 받은 연세대학의 아시아 연구기금처럼, 소리 없이 온다. 도요타 재단 지원금을 받은 학자들의 반민족적 연구로 온다. 세련된 디자인의 욱일기로 오기도 하고 화려한 올림픽의 관객석에서 휘날리는 욱일기로도 온다. 당연히 미국을 등에 업고 온다.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가당치 않은 사건으로도. 지소미아 지속이라는, 주한미군 방위비 6조원 인상이라는 압박으로도 온다. 주한미국 대사의 호출에 득달같이 달려가는 국회의원 나리들의 발걸음으로도,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도 모자라 일장기까지 흔들어대는 광화문 노인네들의 외침으로도 온다.  현재의 정부를 구한말 오갈 데 없던 고종의 무능에 비유하는 일부 정치인의 야유로도 오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소확행을 목표로 삼는 청년들의 무관심으로도 온다.  내년 4월 벚꽃난장이 펼쳐질 대한민국에서 고작 표 하나 달랑 들고 투표장으로 향해야 하는 나의 민주주의가 두려운 이유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9-12-04 | hrights | 조회: 1320 | 추천: 14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어제의 흔적이 오늘을 제약하고 오늘의 흔적은 내일을 규정한다. 올해 하반기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는 한일갈등과 검찰개혁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두 가지는 일제잔재청산이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애초에 검찰이 기소독점과 기소편의 등 각종 특권을 갖게 된 것도 경찰이 친일파 소굴이라는 현실에서 적잖이 기인했다. 많은 국민들이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인식하고, ‘정치인·고위공무원·재벌 등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다’는 걸 원인으로 진단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경축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말했을 정도다.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면의 아들인 장순이 어린 시절 경찰서를 지날 때마다 들었다는 “고문 피해자들의 비명 소리”야말로 친일잔재청산과 좌절된 해방을 보여주는 예리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당시 경찰은 곧 친일파 집합소나 다름없었고 평범한 장삼이사들을 좌경화시키는 교과서였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직후 경찰 고위직에 몸담았던 최능진은 “이러한 정세가 계속되면 한인의 80%가 공산주의 쪽으로 돌아설 것이다”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을 정도다. 물론 최능진은 그 직후 경찰에서 짤렸다.  우리가 기억하는 해방 혹은 일재잔재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썩 믿을게 못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이들이 조선총독부 앞에 일장기가 1945년 9월 9일까지 걸려있었으며,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그 전날 인천에 상륙했던 미군이 항복 조인식을 한 뒤 일장기를 내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장기를 내린 미군이 곧바로 성조기를 게양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중들이 패전 소식을 들으면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을 공격할까 걱정했다. 결국 몽양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경제범 즉시 석방, 경성에 3개월 치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학생훈련과 청년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 항을 요구했고 수락을 받아냈다. 여운형은 그날 저녁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6일에는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형무소에서 정치범과 경제범 약 1만 6000여명이 풀려났다. 17일에는 건준 부서 결정을 완료했다. 치안유지 권한과 방송국 등 언론기관도 조선총독부한테서 이양 받았다.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독부에게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고하자 총독부는 8월 18일 오후에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꿔 달았다.  조선총독부는 미 군정청(MG)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일괄 사퇴한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은 비공식 고문이 됐다. 이들은 한국인 '인재'들을 미군정에 추천했다. 그리하여 조병옥 경무국장, 장택상 수도경찰국장을 비롯해 노덕술 같은 이들이 경찰 핵심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일본 군대는 “심지어 ‘미군정’이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신나게 거리로 나와서… 미군정의 권위하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하는 한국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무리지어 활보하고 다녔다. 무장한 일본 군인들은 ‘미군이 재가한 일본군 파견대’라고 쓴 트럭을 타고 시내를 오갔다.” 사진 출처 - JTBC  친일잔재는 살아남았다. 청산?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진실의 반쪽을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육성한 건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친일잔재를 살려낸 건 미군정이었다. 그 이유는 경찰을 감독하던 윌리엄 매글린 대령이 “우리는 만일 [일제하 한국 경찰이] 일본인들을 위해서 일을 잘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큰 그림에서 보자면 미국의 세계전략은 일본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반공 방벽을 만들려 했다. 한반도 남부는 미국과 '일본'의 하위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이승만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며 분단을 공식화한 게 1946년 6월 3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달 전인 그 해 4월 6일 "미 점령군 당국은 남조선에 한하여 조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는 AP통신 보도가 나왔다. 요즘은 한미동맹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든 것 같다. 한일갈등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한일관계와 한미관계, 그리고 미일관계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보지 못하는 건 반쪽짜리 인식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혹시 한일갈등 혹은 한중갈등이야말로 미국이 구사하는 현대판 '이이제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11-27 | hrights | 조회: 930 | 추천: 2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치경제학에서 ‘교환가치’(exchange value)니 ‘사용가치’(use value)니 하는 말을 한다. 교환가치는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는 상품들 간의 속성이다. 배추 한 포기와 과자 한 봉지를 바꾼다면, 배추 한 포기의 교환가치는 과자 한 봉지 정도에 해당한다. 한 시간 노동한 대가로 만 원을 받는다면 노동의 ‘사용가치’가 만 원이라는 뜻이다. ‘교환가치’는 대등하게 계량화한 주고받기로 나타나고, ‘사용가치’는 내심 더 많은 것을 받으려는 전략적 시도로 이어진다. 가치를 더 많이 확보할수록 부를 더 축적하게 된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상상을 하게 해주었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의 포틀래치(증여행위)를 연구한 『증여론』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이 책에 의하면, 교환은 증여(gift)로부터 이루어진다. 누군가 증여하면, 받은 만큼, 아니 받은 것 이상으로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규정된다. 모든 교환행위는 증여로부터 시작되고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때 주고받기는 단순히 물질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명예와 지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아가 영적(spiritual) 차원까지 교감하는 행위이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면 받은 것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갚는 행위가 상호 순환하면서 사회가 운영된다. 받기와 갚기가 순환할 때 차별과 불평등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증여가 한 사회를 운영하는 근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모스의 증여론을 ‘호수성’(互酬性, 서로 갚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최근작 『유동론』에서 호수성이 특정인의 과도한 축적과 그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생각을 빌려오면서, 호수성은 재물과 힘의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국가라는 원부(元父)’를 살해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증여와 수증이라는 교환양식은 물건을 축적하며 사는 인간의 정주 생활에서 생겨났지만, 정주 생활이 낳은 계급과 차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호수성은 그저 계량화된 계약 관계에 따라서만 살지 않는 인간의 원초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유목적 유동성’이라고 말한다.  다소 종교적 언어로 하면, 증여는 ‘초월’의 세계, 특정 권력을 넘어서는 ‘보편종교’를 열어주는 동력이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주고, 받고, 갚는 관계의 지속은 근대 국민국가 체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낳은 자본 중심의 ‘세계제국’을 넘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천 관계를 고차원적으로 회복시킨다. 증여론에 담긴 호수성은 과거의 원시 부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정 사례가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아니 도래시켜야 할 ‘오래된 미래’이다.  그런데 이런 사유가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선입견 없이 보면, 수천 년 이상 된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의 메시지도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어져 있다. 누구든 거저 받은 데서 삶이 시작된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신의 은총 혹은 선물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도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 윤리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기, 이것이 자연 혹은 신적 원리에 어울리는 삶이라는 것이다. 졸저 『인간은 신의 암호』에서 이러한 은총의 원리와 윤리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인류의 문제는 주어져 있는 것을 저마다 소유하려고만 하는 데서 발생한다.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한 부의 축적 경쟁에서 승패가 나뉘고 차별과 아픔으로 이어진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주기’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니 그 이상 갚기이다. 주기와 그 이상의 갚기가 순환하는 곳에서는 재물이 특정인이나 세력에 쏠리지 않는다. 모스의 ‘증여론’이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한에게 먼저 주면 안 될까? 난민을 더 수용하면 안 될까? 검찰은 수사권을 내려놓으면 안 될까? 서울‘광역시’ 정도로 바꾸면 안 될까? 증여론, 호수성과 같은 언어를 접하다 보면 갖은 생각이 다 떠오른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체념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외연을 확장한다며 내면을 파괴하고, 나를 위해 남을 몰아내고, 온갖 차별, 소외, 억압, 갈등이 지속되고... 이런 폭력을 언제까지 지속시켜야 할까. 주고, 받고, 갚고, 주고, 받고, 갚는... ‘서로 갚기’의 순환 고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구든지 원래 받은 데서 시작하는 데 말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9-11-13 | hrights | 조회: 1761 | 추천: 12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이 말은 버지니아의 식민지의회 의원이면서 변호사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1775년 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다. 당시 북아메리카 내의 여러 식민지들은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버지니아 역시 독립혁명에 가담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헨리는 영국과 타협이나 협상을 모색할 때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분연히 일어나 싸워야 할 때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면서 자유가 죽고 사는 문제에 버금갈 만큼 인간에게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문지영, ⌈자유⌋)  여기서 자유는 국가의 모든 통치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대표를 통해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릴 자유를 의미한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정치적 결정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인식한 정치적 자유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가 주권재민(主權在民)으로 표상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므로 우리가 정치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도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는 데 있다. 군주의 자의적 권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초래해서가 아니라 내 운명이 내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질고 현명한 군주의 통치는 민주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인민의 이익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운명이 전적으로 군주의 호의와 배려에 달려 있다면 지금 당장의 상황이 내게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근심과 걱정을 거둘 수 없다. 그런 호의가 계속될 지도 불확실하고(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지만 인간의 마음도 갈대와 같다고 하지 않던가!), <통치DNA> 같은 것은 없으니 대대로 훌륭한 군주가 계속 나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자유의 핵심은 자율성에 있다. 우리가 자유를 꿈꾸는 것도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해서다.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그런 자율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이다. 물론 이때의 자율적 자기결정권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 것으로 다른 구성원들의 자유에 대한 고려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 따라서 사회 밖에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오늘날, 자율권으로서의 자유는 단지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민주주의에 의해 자기통치=자율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누구라도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율성은 자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자의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조건만이 아니라 자기다움을 느끼고 생각하는 내적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적 속박의 부재만이 아니라 훔볼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자면, “개체성(individuality)”의 확립이 필요하다.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와 같은 외적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민주 사회의 시민은 국가에 종속된 객체나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대상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생각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선 우리가 고유하고 개성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갖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프롬의 분석에 의하면, 근대인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지만 실제론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는 존재에 가깝다.(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할까.) 예전부터도 자기가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쉬웠다면, 소크라테스 선생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될 리가 없었을 거다.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아는 것, 그것은 해결하기 가장 곤란한 문제에 속한다. 근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프롬의 탄식에 가까운 표현을 빌자면, 자아를 상실한 이런 근대인은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사는 자동인간”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즉 내가 <(남들이) 되도록 기대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내면적 질문은 철학적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로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프롬에 의하면, <나>란 존재가 <타자가 나에게 바라는 그대로의 것>이라면, 그래서 <남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의 반영(反映)>을 제외하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면, 자기 외부의 새롭고 힘센 생각이나 집단의 권위에 기꺼이 동화되려고 한다. 외부의(제국/교회/총통/민족 등의) 거대한 권위에 쉽사리 투항하여 자기 것이 아닌 자기를 받아들이는 무력감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주입된 욕망의 프로그램을 맹목적으로(아니,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로봇이 될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프롬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활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즉 자발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사랑이야말로 자발성의 사례가 아니라 자발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사랑은 자아를 상대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며, 개인적 자아의 보존을 바탕으로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역학적 성질은 바로 이런 양면성 속에 있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을 해봐야 자유를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물론 사랑만이 아니라 일도 자발적 활동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이때의 일은 강박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넓게 말하면,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요컨대 자유를 실현하는 존재가 되려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데 자발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자발성이 단지 선거 때의 투표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과 일상에서, 또 타인과의 관계에서-특히 ‘인간관계의 꽃 중의 꽃’인 사랑에서 자발성을 실현해야 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9-11-06 | hrights | 조회: 1180 | 추천: 8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북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발사에 미국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북이 우주에 쏜 인공위성마저도 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하였다는 이유로 유엔 제재를 받았던 전례에 비추면 격세지감이다.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장막에 묻혀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도 아닌 섬으로 전락한 남단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세상사다. 새로운 대북제재가 나오기는커녕 미국은 뒤로 숨어버렸다. 그렇다면, 유엔 대북제재를 각오한 북의 벼랑 끝 전술로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미국을 상대로 한 북의 벼랑 끝 전술로 각색하기에 바쁜 머저리들이 주인 잃은 개마냥 제정신을 잃고 짖고 있기는 어제나 오늘이나 매 한가지다.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지금 북의 맹공을 보며 자못 놀라면서도 점잖게 미국이 북을 봐주고 있는 거라고 위안하고 있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용 정책의 일환으로 북을 대화상대로 인정해 치적을 쌓으려 했으나 북이 SLBM 발사로 도발하며 트럼프의 화를 돋구었으므로 머지않아 미국의 군사적 응징을 받을 것이다’라고.  동족 혐오와 폄훼에 길들여진 친미사대주의자들은 깨몽하시라.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구인 줄로만 알았던 유엔안보리가 새로운 대북제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책임을 팽개치고 회피한 채 일관성을 상실해 버린 몰골을 드러내는 현재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게다.  유엔을 독무대로 마음껏 세상일에 간섭하며 호령하고 좌지우지하던 어느 패권국은 사라지고 소수의 동료들만 남아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는 SLBM 발사 규탄과 함께 북미 간 대화와 협상을 애걸하는 넋두리를 펼치는 유엔안보리의 이 상황을 말이다.  식민의 충실한 노복들이 인정하든, 않든지 간에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역관계는 변했다. 미국이 시한부로 벼랑 끝 처지에 몰렸다.  북에 대한 미국의 핵전쟁위협과 제재가 무용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북에 대해 ‘화염과 분노’,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언급을 정점으로 미국의 한반도 핵 전쟁위협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분위기로 국내외정세가 변했다.  수십만 명이 동원되는 최강대국 장성 지휘 하의 핵전쟁 연습을 중단하겠다고 그 나라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그 이행을 위한 대화와 협상이 중요한 쟁점으로 되었으니 말이다.  국가보안법에 세뇌된 나머지 동족대결과 친미 사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눈에는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고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의 핵 항공모함, 핵 폭격기, 핵 잠수함이 한반도에 오지 않게 되는 그 날은 적화통일의 악몽을 꾸기에 딱 좋은,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처럼 느껴질게다.  세상이 미치듯 변하고 있을 때 이에 저항만 하며 적화통일의 악몽과 공포에 휩싸여 살기보다는, 그래도 왜 변하는지에 대해 이치만큼은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깨몽과 정신건강에 아주 좋다. 국가보안법에서 벗어나 동족을 대하게 되면 북미 간 누가 공정하고 바른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을 텐데... 국가보안법 폐지 없이는 외세의존 동족혐오 분단정신병의 치유는 어림없고, 분단정신병의 치유없이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민족통일은 요원하다.  국가보안법의 힘에 압도당한 나머지 저항력을 거세당한 이들이 너무나 많은 행세를 해 오고 있다. 정의와 진리 앞에 용기 내어 맞짱뜨며 상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돈키호테처럼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세상으로 물들어 갔다. 국가보안법은 기회주의자와 변절자를 양산하는 저수지로 우리사회의 기강을 흐트러뜨렸다. 국가보안법 앞에 정의도, 진실도, 이성도, 도덕도 모두 사라져가고 있지만 국가보안법의 테두리 안에서 도토리 키재기 식의 백가쟁명만 찻잔 속 태풍처럼 일어나는 형국이다.  국가보안법이 그려놓은 현실이 다 거짓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세상이 변하는 이치를 쉽게 꿰뚫어 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틀지워져 같은 동족으로서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을 적대하며 외세의 편에 선 자기를 아무리 합리화해봤자 그건 정의가 아니다.  1000기 이상의 핵병기를 미군기지 곳곳에 배치해 두고 지상, 해상, 공중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한미연합훈련에 몰입해 동족의 적화통일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조기에 열광하며 안도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조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역지사지로 생각할 힘을 길러야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 세계에서 핵무기가 제일 많은 나라가 매년 방어훈련을 너무 오랫동안 지나치게 하다보니 때때로 북 점령과 정권 격멸 및 지도자 참수작전도 작전계획에 포함되는 지경에 이르러, 북에서도 도저히 방어훈련으로 보이지 않았나 보다. 처음에는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평화협정을 통한 미군철수로 맞서 왔으나 세계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혼자 힘으로 사회주의를 지키다 보니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경제제재가 너무 심하고 동족마저도 편들기는커녕 외세의 편을 들어 북의 붕괴에 가담하는 상황에서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북에 대해 온갖 쓰잘데기 없는 외세와 극우보수세력의 종북몰이 여론에 가담하기 보다는 동족의 편에서 착오 없는 올바른 판단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정의와 진리 앞에 두려움 없이 국가보안법을 극복하고 우리사회를 정상화하여 이성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첩경이다.  결자해지다. 미국의 이익과 패권을 위해 같은 동족을 앞세워 너무나 오랫동안 북을 악마화하고 적대하며 붕괴시키려 했던 미국의 정책을 바로 잡을 때가 도래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안에 새로운 대북정책을 갖고 평양 방문을 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보장하는 실질적 조치에 합의하기를 바란다. 그런다고 유엔 등 국제사회 앞에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횡포가 다 발가벗겨지거나 망하지는 않는다. 패권의 지위에서 내려와 보통국으로 정상화의 길을 나아가는 그 길이 유일무이한 대화와 협상에 의한 평화적 문제해결책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9-10-16 | hrights | 조회: 1402 | 추천: 6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과 믿음  지금부터 약 2천 5백 년 전,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이 될 수 있도록 터를 닦았던 사람이 있었다. 상앙(商鞅)이다. 그는 진 효공의 신임을 바탕으로 재상에 올라 10년 넘게 집권하며 법치(法治)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법이 뭔지도 몰랐다. 상앙은 5미터 정도 되는 나무를 남대문에 세우고 말하였다. “이 나무를 동대문에 옮겨놓는 사람에게는 1백만 원을 주겠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백만 원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속는 셈치고 옮겨놓자, 그는 5백만 원을 주었다.  상앙의 법이 시행된 뒤, 진나라 백성들은 처음에는 만족스러워했다.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고, 산에는 도적이 없었다. 집집마다 풍족하였고, 사람들의 마음은 넉넉하였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서 용감히 싸웠고, 사사로운 싸움은 조심하였다. 도시든 시골이든 편안했다. 법을 어기면 코를 베고, 죽이고, 이마에 죄를 새겼기 때문이다. 비극의 남자  10년이 지나며 차츰 법이 법을 낳고, 인심은 각박해졌다. 상앙이 외출할 때는 무장한 병사들이 경호차를 타고 따라야했다. 천하장사 같은 사람들이 경호를 맡았다. 그러다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주변에서 상앙이 반란을 꾀한다며 밀고하였고 새로 즉위한 혜문왕은 상앙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앙은 달아나 서안(西安) 함곡관 근처 호텔에 투숙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텔 지배인은 투숙을 거부했다. “상앙의 법에 의하면 여행증이 없는 손님을 묵게 하면 관련법에 의해 처벌 받습니다.”  상앙은 법을 만든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상앙은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내지는 신세가 되었고, 수레에 몸을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받아 죽었다. 공자(孔子)의 걱정  사마천(司馬遷)이 길지 않게 기록한 상앙의 일화는 각박한 법률가의 최후를 인용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런데 사마천의 말을 빌지 않아도 상앙으로부터 근 2백 년 전에 이미 공자가 법치(法治)의 함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을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사람들은 처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덕성으로 이끌고 예의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반듯해질 것이다.”  공자의 방점은 부끄러움에 놓여있다. 외부의 강제가 거꾸로 자성의 계기를 잃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를 알고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훈련이 된 인격의 확보가 먼저라는 말이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응당 객관적 기준,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바로 반론이 들어올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여기서 유가(儒家) 역시 한 번도 덕성과 법치를 분리한 적은 없다는 점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사진 출처 - freepik 내가 겪고 있는 소송  3년 전 고속도로에서 후방 추돌을 당하여 폐차해야 했다. M보험사에서 보상 문제로 전화가 왔다. 매매가 1천 3백만 원, 보험가 1천만 원인 차에 대한 보상금으로 4백만 원을 제시하였다. 내가 웃으며 “4백만 원을 내가 줄 테니, 그런 차를 사와 보시구려!” 했더니, 보험사 직원은 5백만 원으로 올렸다. 난 이 사람들이 장난하는구나, 느꼈다.  사정을 들은 법률가 친구가 분노했다. 그는 소송을 해서 합당한 판결을 받자고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어 줄 친구라도 있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은 보험사에서 저렇게 버티면 결국 손해를 본 채 합의하고 말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단다. 보험사는 그렇게 먹고 산단다. 이런 게 그들의 일이고, 관행이란다.  소송이 들어간 뒤 M보험사의 다른 직원, 우리 학교를 담당하는 직원이 찾아왔다. 1천만 원을 채워드릴 테니 그냥 합의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는 반대했다. 바로 그 돈이 필요한 게 아니면 소송해서 판결을 받아 관행을 바로 잡자고. 나 또한 괘씸해서 그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M보험사는 처음에 말로 해결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보상해야 할 것이다. 법률가인 내 친구의 판단에 따르면 말이다. 이해는 가는데  나는 원래 공자의 말에 통찰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또한 일상의 경험에서 ‘법대로’는 곧 인간관계의 종말임을 잘 알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이웃과 싸울 때 “법대로 해!” 소리가 나오는 순간이 파탄의 출발 아니던가?  하지만 보험사의 관행화된 횡포를 바로잡겠다며 소송을 맡고나선 친구의 입장 역시 이해한다. 친구에게는 판결이 정의다. 그는 M보험사를 두고 바보란다. 줄 거 주면 되는데, 비용만 늘린다고. 친구는 판결을 받아놔야 그런 횡포가 줄어든다고 사명감에 차 있다.  어리석음. 이 소송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M보험사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보험사의 횡포를 막을 판례를 남기겠다는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야 남의 일처럼 놔두고 있으니 어리석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어리석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법 없이 산다는 것  요즘 우리는 법 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다. 기소권, 수사권, 구속영장, 구속적부심, 소환, 기소편의주의, 기소독점주의, 자본~법, 뭔 법, 뭔 법. 전 국민의 법률가화(化) 상황에 돌입한 느낌이다.  실제로 텔레비전 토론회를 볼라치면 패널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변호사다. 현재 직업이 뭐든 법 전문가라고 자칭하면서 시시콜콜 따지고 있다. 이건 구속사유가 되느니 안 되느니, 증거가 되느니 안 되느니.  국회의원들은 지들 일을 국회에서 해결 못해서 결국 서로 고발하고, 주택 수백 채를 가진 갭 투기꾼은 법적으로 문제없으니 고소하려면 하라고 하고, 한 학생 대입자료 조사를 위해 검사 수십 명이 들러붙고 등등. 이루 셀 수 없는 만성화된 법에의 호소, 뒤따르는 법의 능멸이다.  계속 이렇게 법으로만 풀어가려 해도 괜찮을까? 나는 불안하다. 단,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식상한 말에서 이 법치 과잉의 사회를 탈출할 희망을 본다. 법 없이 산다는 것은 알아서 한다는 것이고, 잘못해도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법 없이, 혹은 최소한의 법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이런 삶이 법치를 가장한 어리석음을 넘어설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연대와 우정보다 단절과 소외를 낳는 외마디, “법대로 해!” 그 척박함 때문에라도, 법 없이 산다 함은 이 사회와 문명에 대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 자체이다. 감히 예언한다. 법의 능멸을 극복하는 이는 법기술자가 아니라,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이 글이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올라간 뒤, 칼럼의 우려를 증명하듯이 두 가지 사태가 또 벌어졌다. 유시민 이사장은 알릴레오에서 김경록 PB와의 인터뷰를 발표했고, 거기서 KBS 보도의 왜곡을 지적했다. 지적이 타당한지 어떤지는 일단 놔두자. KBS 사회부장이 보직을 사퇴할 수도, 경영진이 무슨 조치를 취할 수도, 기자들이 의견을 낼 수도 있다. 여기서 예의 빠지지 않은 말이, 가장 먼저 나온 말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KBS가 언론으로서, 하나의 거대 공영조직으로서 취할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법적 대응’인가?  또 하나. 한겨레21에서 윤석렬 검찰총장이 김학의가 성접대를 받았다던 윤중천 소유의 별장에서 접대를 받았다는 기사를 냈다. 이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대검찰청도 대뜸 ‘법적 대응’을 꺼냈고, 당사자 윤석렬은 고소하겠다고 한다. 더구나 검찰은 수사, 조사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해명,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고소, 고발을 해야 할까? ‘법적 대응’이 이 사회의 무조건반사가 된 듯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9-10-10 | hrights | 조회: 1112 | 추천: 8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주말 서초동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이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으론 놀랍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검찰 개혁’에 동의하는 마음은 이미 촛불과 함께 있지만 ‘조국 수호’ 슬로건에는 반대하거나, ‘공수처 설립’이 곧 검찰 개혁을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들이다. 누군가는 촛불 연합의 붕괴를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박근혜 탄핵 촛불 때 잠재했던 차이들이 드러나고 경쟁하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건 차이가 드러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차이를 넘어 연대하는 것이다. 연대하려면 최상위 슬로건에 합의해야 할 텐데, 그것이 ‘검찰 개혁’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조국은 조연에 불과하다  문제는 지금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조국 수호’를 ‘검찰 개혁’과 등가로 내걸고 있다는 점이다. 김민웅 교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나는 김민웅 교수를 좋아한다. 그가 지난여름 <프레시안>에 연재한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해박하고 매력적인 지식인인지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지난 주말 촛불집회 연단에 서서 “지금은 조국이 검찰 개혁”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행태가 과도하기 때문에 이제 조국은 사퇴할 수 없고, 조국을 내어주면 대통령까지 위험하다. 그러므로 조국을 지키는 게 검찰 개혁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조국 장관의 인사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나, 행정가로서 능력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이 주장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무엇보다 현 정세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지금 벌어진 ‘검찰 개혁 정국’을 만든 건 조국이 아니라 검찰이라는 점이다. 검찰이 ‘오버’하지 않았다면 촛불집회도 없었을 것이다. 검찰의 오만함이 ‘조국 논란’을 ‘윤석열 사태’로 바꾼 것이지, 조국이 특별히 무엇을 한 결과가 아니다. 지금 무대에 오른 연극에서 조국은 전개상 필수적인 에피소드를 제공한 조연에 불과하다. 굳이 조국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새로운 주연, ‘촛불’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극의 결말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검찰이 조기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국 법무부 장관’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론이 돌아선 상황이었다. 최근 <한겨레> 보도를 보면, 고심하던 대통령으로 하여금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하게 한 주된 이유가 윤석열의 ‘조국 불가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도 조국은 조연에 그친다.  물론 지금은 사퇴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면 거기서 그쳐야 한다. 최소한 촛불집회의 메인 슬로건에서는 ‘조국 수호’를 빼야 한다. 그것이 외연을 넓히는 길이고 촛불집회가 성공하는 길이다. 조국 수호에 갇히면 민주당원들만의 잔치가 되고 만다. 진정한 검찰 개혁도 어려워질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공수처 설립은 철 지난 과도기적 방안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참여연대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일종의 과도기적 개혁안이다. 무소불위 검찰 권력의 원천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하지만 이걸 단번에 분리하기는 쉽지 않으니 일단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또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검찰을 견제하자는 논리다. 나는 공수처가 언제든 대통령의 칼로 변할 수 있으며 최소한 또 하나의 대검 중수부(지금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될 가능성이 크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수사 총량이 늘어나므로 인권 신장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반대해 왔다. 결정적으로 이 방안은 검찰의 부패나 비리 등을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선민의식에 빠져 선출권력까지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행태를 막는 데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공수처와 선명성 경쟁을 한답시고 더 전방위적이고 무리한 수사를 벌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요컨대 공수처는 검찰 개혁의 전망이 어둡던 시절에 만들어낸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견제에 초점을 맞추느라 권력 축소에 소홀했던 과도기적 방안이다.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 박근혜 탄핵 촛불 이후에도 검찰 개혁이 제1의 과제로 꼽혔지만 지금처럼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는 어려웠다. 각론에 대한 국민의 이해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조국 사태’를 겪으며 국민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진 검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 사회적 흉기인지 소상히 알게 됐다. 둘을 분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어두운 소식이 들린다. 조 장관이 제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만들었는데(이탄희 판사 같은 훌륭한 분을 모셨다고 한다) 주요 논의 과제가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 방안이라고 한다. 또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이다. 검찰의 직접수사는 축소해야 할 게 아니라 아예 폐지해야 한다. 지금이 평시도 아닌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래서 그가 검찰의 분탕질 없이 무난하게 법무부 장관이 되었더라도 검찰 개혁을 잘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검찰이 10월 1일 특수부 축소 방안을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직접수사 축소는 검찰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어차피 얘기 되는, 그래서 문제 되는 직접수사는 과거의 중수부, 지금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수사이기 때문이다. 일단 특수부를 유지하기만 하면 나중에 필요할 때(이번 조국 일가 수사처럼) 얼마든지 인력을 늘릴 수 있다. 대검 중수부를 폐지할 때도 서울 특수부가 그 역할을 대신 하게 될 거라는 우려가 있었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에 깜짝 놀란 듯 하루 만에 내놓은 대책이지만, 나는 검찰이 여전히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 수사권 박탈하고 기소법정주의 도입해야  공수처 설립과 검경수사권 조정 등은 어차피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라타 있다. 그건 그것대로 흘러가게 두고 근본적인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마치 공수처가 설립되면 검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기만이다. 촛불집회 구호에서 ‘공수처 설립’을 빼야 하는 이유다. 그냥 검찰 개혁이면 충분하다. 세부 내용은 국회가 채우면 된다. 굳이 법무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검찰을 국가기소청으로 축소해 기소와 공소유지만을 담당하게 할 수 있다. 기소편의주의는 기소법정주의로 반드시 바꿔야 한다. 검찰 마음대로 기소와 불기소를 결정하는 기소편의주의가 얼마나 많은 부정과 비리의 원천인지 알만한 사람은 안다. 미국의 연방수사국 FBI 같은 국가수사청을 만들어 수사 기능을 맡기는 방안도 가능한데 제2의 검찰 특수부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사실 기소권만 없어도 지금의 검찰 같은 패악질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각계의 여론을 모아 근본적인 검찰 개혁 방안을 마련해 보면 어떨까. 개혁방안논의 과정 자체를 축제처럼 기획한다면. 그렇게 해서 나온 방안을 내년 총선 공약으로 발표하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 다수당이 된다면 입법을 통해 그대로 실행하면 된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마련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10-02 | hrights | 조회: 4961 | 추천: 63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 주변의 애국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상 징후가 감지된 것은 추석 연휴 때부터입니다.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 연휴, 지난해까지만 해도 스스로 노빠라고 말하는 형과 박정희를 신으로 알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빨갱이와 매국노 사이를 오가며 사뭇 심각한 사태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새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삭발하고 검찰의 칼질이 시작되자 뻔 한 언론들이 게거품을 물고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머니와 형은 이번 조국 사태(?)를 놓고 누가 더 진정한 애국자인가를 놓고 한바탕 소란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역시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전략’으로 대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적당히 술에 물 타고 물에 술을 탔다가는 정말 큰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온 가족이 점심을 먹고 상을 물린 다음에도 두 애국자는 별 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TV에서 추석 민심 어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도 어머니와 형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습니다. 그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 막 고등학생이 된 막내 조카의 여자 친구 이야기, 암투병 중인 작은아버지 걱정 등등 그야 말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추석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애국심만 빼면 이렇게 평화로운 가족 모임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두 사람의 열렬한 애국심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저는 한편으로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일곱 명의,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었으니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다른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는 저에게 ‘종북’이라고 화를 냈던 친구도 있고 늘 뜨뜻미지근한 제 태도를 타박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월수입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대부분 애국자들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크고 작은 애국 논쟁이 벌어집니다. 술잔이 깨질 정도의 큰 다툼이 일어나 원수처럼 지내다가도 이렇게 또 만나곤 했습니다. 조국 사태는 점점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를 만큼 거의 미쳐가는 지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대학총장, 표창장, 사모펀드, 5촌 조카, 반대 시위 또 다른 반대 시위 등등 수많은 애국자들이 여기저기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역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는 애국적 견해가 특히 다른 두 친구의 싸움이 걱정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술잔이 날아다는 지경에 이를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은 또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술잔이 여러 번 돌았음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저 그런 소소한 자기 사는 이야기만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요즘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거나, 몸이 좋지 않아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 걱정, 아이들 자랑 등등이 주된 화제였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술잔이 돌고 잠시 아무 말도 없을 때, 저에게 종북이라고 비난했던 친구가 황교안 씨의 삭발 사진이 있는 기사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드디어 시작되나 싶었는데 그 친구의 표정은 무척 덤덤했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어휴... 이런 한심한 새끼를...”  그러자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습니다. 잠시 후, 저에게 뜨뜻미지근하다고 타박해온 친구가 그에 답이라도 하듯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조국이 말고는... 사람이 그렇게 없나?” 무슨 선문답 같은 대화를 끝으로 그날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습니다. 우려했던 애국적 싸움이 없었던 것 때문일까요, 갑자기 피곤이 몰려 왔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술자리에 둘러앉은 모두가 너무 피곤해서 입조차 떼기 힘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9월 25일 오전 충남 천안시 대전지검 천안지청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을 응원하는 지지자와 사퇴를 촉구하는 보수단체가 팻말을 들고 각각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혼란하다 혼란해...’  이쪽 애국자도, 저쪽 애국자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애국자도 정말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검찰 개혁은 이렇게, 이런 식으로 물 건너가는 것일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9-09-25 | hrights | 조회: 1055 | 추천: 7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들과 얘길 하다가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 좋다고 한다. 넌지시 물어봤다. “일본은 어때? 온천 좋아하잖아.” 대답이 걸작이다. “에~이. 이 시국에 일본은 좀 그렇잖아?”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웃고 말았다. 초등학생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최근 한일관계는 확실히 좋지 않다.  정밀한 분석을 할 만한 식견은 없지만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국가전략 차원에서 ‘일본판 햇볕정책’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전략의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질적으로 바꿨듯이 그 대상을 일본으로 바꿔서 대입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일본과 전쟁할 것도 아니고 일본을 통째로 대서양으로 옮길 것도 아니라면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가 만든 정책”이라는 걸 최대한 돋보이게 해서라도 반대 여론을 일으키고 싶은 정책이 있다. 많은 이들이 고향사랑기부제, 속칭 고향세를 처음 들어봤을 줄 안다. 하지만 무려 국정개혁 100대과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 가운데 하나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관련법률만 14개나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정책을 열렬히 반대한다.  고향사랑기부제란 ‘개인이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일정액을 기부하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기부금 일부에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다.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명분은 수도권·대도시와 비수도권·농어촌 지역 간의 재정 격차를 완화하고 농어촌 지자체의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지역균형 발전 대안이라는 이유다.  이 제도의 원조인 아베 총리는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고향납세제도’를 발표한다. 자유민주당의 핵심 기반인 농어촌 지자체의 지지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게 정설이다. 국내에서는 2007년 대선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공약으로 제안했다.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도 2007년 대선과 2010년 지방선거 공약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부작용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중도 폐기했다. 그랬던 걸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에 포함시키면서 수면 위로 올라와 버렸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을 돕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방재정 악화와 격차확대라는 오랜 현안까지 감안하면 고향에 일정액을 기부하고 세액공제 혜택도 받는 고향사랑기부제도는 뭔가 좋은 제도인 듯 보일 법도 하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라는 법은 없다. 결국 정치는 결과로 말하게 돼 있다. (그래서 내가 정치를 바라볼 때 가장 싫어하는 말 두 가지가 ‘진정성’과 ‘아름다운 패배’다.) 그런 면에서 고향세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 제도에 대해선 이미 많은 우려가 나온 바 있다. 이 문제를 취재하면서 지방재정 전문가 십여 명을 인터뷰했다. 찬성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반대 이유는 대체로 일치한다. 정책목표 달성의 불확실성, 세수안정성 훼손 가능성 등이다. 정책목표 달성의 불확실성은 한마디로 이런 거다.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제도를 도입한들 기부금이 쥐꼬리만큼밖에 안된다면 뭐하러 하느냐. 오히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자체마다 기부금 액수를 늘리려 하면서 과열경쟁과 부정부패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이미 일본에서 고향세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기부금에 대한 인센티브 차원에서 지자체가 기부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답례품이다. 일본에선 답례품 제공 비용이 고향납세 수입액의 80~90%에 이르는 곳도 있다. 아예 기부금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답례품 쇼핑몰도 등장했다. 지자체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노트북이나 골프용품, 심지어 부동산(토지)까지 답례품으로 등장해 중앙정부가 규제에 나서는 실정이다. 이미 일본 서점가에는 답례품을 재테크와 절세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 수십 종이나 된다.  더 암울한 시나리오도 예상할 수 있다. 향우회를 동원한다거나 지자체 공무원을 동원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고향사랑기부금 실적과 답례품을 미끼로 활동하는 브로커가 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기부금 액수보다 관련 공무원 인건비가 더 나올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 제도 도입하면 몇 년 안에 전국 시군마다 고향사랑기부제도를 담당하는 전담부서가 생기고 승진이나 성과평가와 연계될테다.  고향사랑기부금 실적을 올리기 위해 답례품과 함께 등장하는 게 세액공제다. 하지만 이는 고소득자에게 유리한 절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 일본에서 그렇게 됐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지방세 비중 확대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 재정분권 정책의 특성이 압축돼 있다. 대선 공약으로 등장하면서 공론화 과정이 생략됐다. 이제 답은 정해져 있다. 관료들은 그저 직진할 뿐이다. 지방자치단체, 특히 비수도권 농어촌 지자체는 제도 도입에 적극 호응하지만 수도권 지자체는 시큰둥하다. 이게 국가 차원에서 좋은 일일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나에겐 내 고향보다 아들의 고향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서울에 기부하고 싶다. 5000만 인구 중에 서울 등 수도권이 고향인 사람이 못해서 수천만은 될 텐데 그들이 고향사랑 정신으로 ‘고향’에 기부한다고 해보자. 그럼 이 제도는 정책 목표를 달성한 것일까 아닐까. 관련 법률안들은 대부분 기부대상에 수도권 지자체는 빼버렸다. 그럼 이게 무슨 ‘고향사랑’인가. 고향사랑기부금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흘러가다가 나중엔 왜 출항했는지도 잊어버리게 생겼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9-19 | hrights | 조회: 1623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