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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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거의 35년 가까이- 잊고 지냈던 ⌈나와 너⌋를 떠올리게 된 것은 15개월 이상 지속된 ‘코로나19’ 사태 때문이었다. 철부지였던 시절 연애편지 쓰려면 이만한 책이 없다는 선배의 꼬임으로 산 그 책은 물리적 수명을 다하고 버려졌지만, 책이 전해준 실존적 메시지는 아직도 기억의 인화지에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나’ 그 자체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너(Ich und Du)’ 사이의 나> 아니면 <‘나와 그것(Ich und Es)’ 사이의 ‘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려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언제든지 대상이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도구적인 관계인 반면에,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낯으로 사람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의 나는, 1)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거나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며, 2)그 관계가 <나와 ‘그것=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대=사람’의 관계>가 될 때,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된다는 부버의 두 전언 가운데 후자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사랑할 때, 나는 너로 인해서 나가 되고, 너 안에서만 나가 된다. 삶이란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그 만남이 사랑의 만남일 때 자신이 사람답다고 실감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마스크 없이 사람을 만나던 시절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는 관계 속에서만 참된 자아와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앞의 전언에 더 끌린다.  만남 자체가 제한되면서 관계 지향적인 인간의 존재 조건이 위축되면, 인간은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기 쉽다. 신독(愼獨)이란 나에게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서 객관적 현실에서 관계 맺음이 어렵다면 관념적 현실에서라도 ‘사람 관계’를 떠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그 욕망에 졌고, 아래의 사념은 그 패배의 흔적이다. 부모와의 만남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이치(理致)라는 게 있는 것만 같다. 향유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 절감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부모 중 한 분이 최근에 식사량이 줄면서 몸무게가 부쩍 줄었다.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디스크와 관절염이 심해져 걸음걸이조차 힘들어졌다. 매주 찾아뵐 때마다 기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만큼 그분의 은혜가, 아니 존재 자체가 얼마나 중(重)한지를 절감한다. 나는 인간이 벌이는 모든 일은 헛되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라는 냉소적 주장을 믿지 않는다. 순진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근거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타이르고, 자신의 고통보다 자식의 편안을 늘 앞세우는 부모의 존재다. 그분들은 사람이 학교에서 자연의 물리나 역사의 이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서 인생에서 세월의 속절이나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인들이다. 부모라는 존재, 그들과의 만남은 낙관적 역사의식의 근원이지 싶다. 스승과의 만남  6개월 만에 죽마고우 둘과 스승을 모시고 막국수와 감자부침으로 점심을 했다. 중학생 때부터 뵌, 은사(恩師)라는 말에 실감을 불어 넣어준 스승과의 그 자리에서 나는 마음 놓고 편안할 수 있었다.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떼어내고, 개인적으로 방심(放心)해도 무방한 사람들과 함께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힘이다. 경제적 타산성이나 공리주의적 유용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의미의 무용한 관계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청춘과의 만남  ‘코로나19’ 사태에도 어쨌든 학교 강의는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으로든 청춘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친구는 이런 감각이야말로 늙었다는 증거라며 나를 타박했지만, 선생-학생이라는 일종의 위계관계를 전제로 한 만남일지라도 나에게 청춘을 만나는 일은 늘 흥미진진한 일대 사건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민태원, 「청춘예찬」)이기에 청춘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밝고 환한 빛이 난다. 그들을 보기만 해도, 시절은 엄혹했고 마음은 싸움에서 빗겨 있다는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던 나의 이십 대가 뒤늦게나마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이상과 희망을 추구하는 ‘속성’이라는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전언에 마음이 혹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나이 때에는 몰랐고, 그들의 처지였을 때는 깨우치지 못했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려는 이상과 희망>을 견지하는 늠름한 후속세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설렘을 자아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절에도 마음이 따뜻하면 몸은 견딜 수 있다는 세속적 트임 혹은 자기-주술적 주문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서둘러 약삭빠르게 사는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깨우침이라는 게 생기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걸 이제야 절감한다. ‘바이러스와의 관계’ 말고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인 때가 지금 더욱 그리운 이유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1-05-12 | hrights | 조회: 1163 | 추천: 6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나라 5000만 인구 가운데 2600만이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도에 산다. 우리나라 전체 면적 중 고작 11.8%에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전, 대구, 울산, 부산, 광주 등 수도권 외 지역의 대도시(광역시) 인구까지 고려하면 흔히 도시 사람들이 ‘시골’이라고 부르는 지역 소도시의 인구는 매우 적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세종시와 제주도의 인구를 합쳐도 16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토의 대부분인 85% 면적에, 수도권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30%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인구 10만 명이 넘지 않는 지자체가 87곳에 달했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105곳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228개 지자체 중 절반 수준이 앞으로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역의 인구감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진부한 이야기가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부청사 및 공공기관·공기업 등이 지방 이전을 추진했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하다. 2019년과 2020년 사이 단 한 해 동안 소멸위험 지역은 8곳이나 늘었다. 2019년 전국 읍면동 소멸위험지수 지도 사진 출처- 통계청  인구가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사회문제만큼이나 인구가 크게 줄면서 나타나는 지역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지역의 인구가 줄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정자립도가 낮아지는 등 경제적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우려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라면 인근 지역과 통폐합을 통해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역의 인구가 줄고 소멸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역이 소멸된다는 것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고유한 문화 공동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70년대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고 사회의 문제로 깊어지기까지 국가는 정책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문제를 방임해왔다. 몇몇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며 아파트를 건립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유치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각종 기관과 시설이 도시에 모였다.  반면 지역은 빈집이 늘고, 아이들은 줄면서 학교가 폐교됐다. 병원조차 수익성이 없다며 입주를 거부했다. 소방인력과 경찰인력도 줄어 여러 개의 읍·면을 하나의 119안전센터나 파출소가 감당하게 됐다. 지역주민들은 서울과 대도시에 살지 않고 지역에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도시민들에 비해 신속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대도시로부터 밀려난 열패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소외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결코 지을 수 없는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나 산업폐기물처리장 등 환경저해 시설이 밀려 들어와 환경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한다.  심지어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송전하는 과정에서 당진지역 노선은 대부분 고압송전탑을 건설해 가공선로로 지나지만, 바다를 건너 경기도 평택부터는 땅속으로 연결하는 지중화를 한다고 하니 지역적 차별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울로 대학을 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지역은 떠나야 할 곳으로 인식시키면서 어떻게 지역의 인구감소를 막고 지방소멸을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정치권과 언론, 학계 등에서 지역의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해 수도 없이 거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다. 지역을 소외시키고 지역주민들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8 | hrights | 조회: 1506 | 추천: 7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버지는 황해도 사람, 어머니는 경기도 사람이지만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생활해왔다고 해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행정구역상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문득 ‘서울 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라고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1. 등신 같은 서울 놈  거의 30년 전, 제가 따르던 선생님이 늦은 나이에 수중 잠수의 매력에 빠져 저를 바다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해 여름, 경북의 수중 잠수 포인트인 ㅇㅇ군 바닷가에서 일주일 가까이 지낼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따라는 갔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저는 항상 물 밖에만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일행들이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는 동안 저는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그 지역 수중 잠수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수와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역시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석별의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20명 가까운 사내들의 술잔을 부딪는 소리가 잦아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서로의 무용담을 과시하느라 왁자지껄했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지, 서울과 비교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하는 자랑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다소 위험할 정도의 격한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음에 서울에서 한번 뭉쳐 보자”는 말로 자리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술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의 막내쯤 되는 20대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각하가 합천에 내려와 구속될 때까지 뭐 했십니까?”  당시 구속된 각하는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정색하며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서울 놈들은 다 등신들 아입니까?” 사진 출처 - freepik #2. 답답한 서울 놈  얼마 전에 친구 H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와 H는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저는 서울 시민이고, 그는 oo도민입니다. 그와 3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각자 결혼을 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짬짬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주변에 경조사가 있으면 만나곤 했습니다.  겉으로만 요란하고 속은 물렁물렁한 저와는 반대로, H는 원만한 성격에 말수는 적지만 속은 아주 단단한 사람입니다. 두어 달 만에, 서울시장 보궐선거 바로 전날 전화를 걸어온 그의 첫마디는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어때?”  “그렇지, 뭐...”  이후에 그는 주변 친구들의 안부나 돌아가신 은사님들과의 추억담 같은 이야기들을 한참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랐습니다.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내한테 이끌려 사전투표했어.”  열렬한 문재인 정부 지지자인 그는 그제서야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서울은 어떨 것 같아?”  “나야 잘 모르지...”  무덤덤한 제 대답에, 그는 답답하고 초조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 이 친구, 서울 사람이...”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1 | hrights | 조회: 851 | 추천: 4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뒤 언론계의 관심사 중 하나는 오세훈 시장이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오세훈 시장은 후보 시절부터 교통방송은 시사가 아닌 교통정보와 기상에 집중하라며 대립각을 세웠다. 선거 전날 뉴스공장은 오세훈 후보와 박형준 후보 관련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90분 내내 진행하면서 편파성 논란에 정점을 찍었다. 국민의 힘은 악의적이고 선동적인 방송이라며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교통방송에서 김어준씨를 퇴출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이십만 명이 넘게 참여했고 앞으로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총공세에도 김어준은 여전히 “쫄지마!”를 외친다. 졸긴커녕 선거 다음 날 방송에서 "('뉴스공장'이) 마지막 방송이길 바라는 분들이 많을 텐데 그게 어렵다"며 여유를 보였다.  라디오에서 아침 출근시간대 시사프로그램은 핵심 시간이다. 가장 핫한 이슈와 인터뷰이를 놓고 날마다 치열한 섭외경쟁을 펼친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김현정의 뉴스쇼는 10여 년 전부터 당사자 인터뷰로 본격적인 라디오 시사의 장을 열었고 여러 채널에서 아침시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정권의 노골적인 압력으로 손석희씨가 하차하는 등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한때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가 시사프로그램의 대안으로 떠올랐고 여기서 활약한 주인공들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필두로 지상파에 대거 진출, 라디오 시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2016년 9월에 시작한 뉴스공장은 1년 만에 청취율 10%대로 올라섰고 2018년부터는 컬투쇼를 제치고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예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딴지일보와 나꼼수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어준은 형식과 가식을 던져버린 적나라함과 유쾌함으로 이를 이뤄냈다. 정색하는 시사가 아니라 풍자와 해학, 위트까지 곁들이면서 시사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청취율 1등인 동시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제재도 가장 많이 받았다.  라디오의 입장에서 보면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성공은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터넷과 영상매체의 우세 속에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라디오의 가능성과 시사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방송의 객관성과 중립성이 흔들린 점은 분명 위기다. 청취율을 위해서는 정치적 팬덤에 올라타는 것이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사실 청취율에 목매는 방송사로선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공정성과 객관성 이런 개념은 어떻게 보면 방송사에겐 족쇄일수도 있지만 방송이 엇나가지 않게 하는 준거이기도 했다. 이 틀을 벗어던지는 순간 자유를 얻을지언정 신뢰는 흔들릴 수도 있다. 제도권 방송, 그중에도 레거시 미디어에 너무 오래 몸답고 있어 내 생각이 고리타분하다고 하겠지만 신뢰가 무너진 방송이나 언론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잘 나가는 게 배 아프기도 하지만 고마운 마음도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시장 전체가 활성화되고 전체 파이가 커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늘 떠나지 않는 걱정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서울시장이 바뀐 후에도, 뉴스공장이 지금처럼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뉴스공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이른바 공영방송에서는 일상화된 문제이기도 하다. 정권의 변화에 따라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은 논조와 색깔이 확확 바뀐다. 어떨 땐 너무한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이 정상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정상인지, 과연 이런 논조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늘 궁금하다. 해묵은 숙제 같은 수신료 논란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정권마다 방송의 색깔이 바뀐다면 공영방송이라 이름 붙이긴 어렵지 않을까. 그만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방송의 공영성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편파’라는 이유로 방송을 퇴출시킬 순 없다. 이런 기준을 들이댄다면 종편도 벌써 서너 개는 퇴출됐어야 마땅할 것이다. 방송사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편성권은 독립되어 있어 함부로 입김을 불어 넣을 순 없다. tbs는 지난해 2월 서울시 미디어재단으로 독립했기 때문에 인사나 재정을 통해 시장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다. 법으로 보장된 방송의 독립성이 뉴스공장에 든든한 방패막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뉴스공장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김어준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음모론이나 정치적 편향성을 정당화해주지도 않는다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오세훈 시장도 국민의 힘도 뉴스공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뉴스공장을 손보지 말고 그냥 두자는 일부 보수의 비아냥거림이다. 그냥 내버려 둬서 내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의 엑스맨 역할을 하도록 지켜보자는 것이다. 상소문 형식의 국민청원 글로 유명해진 ‘진인’ 조은산은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로 갈등과 분열의 정치, 극성 친문 세력 놀이터에 불과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과대평가, 국민 과소평가를 들었다. 한 논객은 뉴스공장을 나치의 선전방송에 빗대기도 했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라디오의 대표 프로그램이 정권의 엑스맨 취급을 받고 정치세력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지탄을 듣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세금을 왜 교통방송에 지원해야 하냐는 질문은 나올 수밖에 없다. 청와대 게시판의 청원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팟캐스트가 아니라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방송이기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파성이 아닐 것 같다. 막연하고도 케케묵은 골동품 같지만, 공정성과 객관성이란 단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무엇이 객관이고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한 기준이나 주장은 다를 수 있다. 정해진 답도 없고 각자의 기준도 다르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공중에 떠도는 전파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 같지만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만이 맴돈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14 | hrights | 조회: 1356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를 두고 벌어진 역사왜곡 논란은 결국 드라마를 조기종영하는 걸로 끝이 났다. 사실 애초에 이러저러한 논란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차분히 생각할 틈도 없이 진행된 드라마 자체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결말이 내게는 꽤나 놀라웠다.  논란을 촉발한 계기는 평안도 의주로 입국한 선교사들에게 월병 등 갖가지 중국 요리를 대접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제작한 처지에선 ‘사극도 아니고 좀비가 나오는 판타지물인데 역사왜곡 논란이 웬말이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애초에 태종과 세종 등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게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도 든다(드라마 ‘킹덤’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건 논외로 치겠다). 그냥 ‘해를 품은 달’처럼 적당히 조선시대스러운 방식으로만 처리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지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모호한 가상의 시대를 설정했더라도 요즘처럼 김치나 한복 원조논쟁이 있는 시국에서 논란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과연 ‘조선구마사’는 역사를 왜곡했을까. 사실 그 문제를 토론하는 건 내 몫은 아니다. 그 드라마를 본 적도 없고, 1차 사료에 해당하는 드라마 원본을 확인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 다만 토론해보고 싶은 주제는 이런 것들이다. 만약, 그 드라마에서 선교사들이 대접받았다는 음식이 전주비빔밥이었다면 어땠을까. 선교사들과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치맥 비슷하게 생긴 음식으로 러브샷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면 지금처럼 시끄러웠을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베이징에서 조선 사신들과 만난 선교사들이 “교황청 문서고에서 옛 문서를 보니 이곳은 예전에 ‘코리’라는 강대한 나라가 다스렸던 땅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더라면 역사왜곡 논란이 벌어졌을까 안 벌어졌을까.  사실 한국에서 만든 사극이라면 드라마나 영화 가리지 않고 일부러 안 본 지 꽤 오래됐다. 어쩔 수 없이 본 적도 물론 있지만, 한결같이 후회만 했다. 기본적인 역사고증에 너무 무신경한 게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명량’은 ‘올바른 역사 교과서’ 시책에 부합하는 우주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30분 정도 뒤부턴 아예 중간중간 졸았다(물론 막판에 조선 수군이 엄청난 속도로 박치기 퍼레이드하는 장면은 잠이 확 깰 정도로 참신하긴 했다). ‘안시성’에선 느닷없이 ‘킹덤 오브 헤븐’의 오마주(그래 오마주라고 믿어보자)가 등장하는데 물론 이 장면도 충분히 웃겼다. 정작 역사학자들한테서 받은 조선시대 전술과 무기체계 자문을 성실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건 역사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킹덤’이었다는건 꽤나 아이러니다.  단순히 고증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다. 어떤 드라마는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연개소문’에선 고구려가 얼마나 위대한지 설명하면서 환단고기를 근거로 드는 내레이션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에선 산동반도부터 절강성 유역까지 고구려와 백제 영역으로 표시한 지도가 버젓이 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두고 역사왜곡 논란이 뜨거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헝가리 마자르족이 부여족의 후예’라거나 ‘낙랑군이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글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데도 역사왜곡 논란은 변변치 않았다.  요즘 중국이나 일본과 관련한 역사왜곡 논란은 꽤나 예민한 주제다. 동북공정이니 일제시대 같은 주제와 연결되면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역사공부가 즐거운 것은 ‘우리 조상은 위대했다’거나 ‘우리 조상들은 넓은 부동산 가진 땅부자였다’는 걸 발견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알고보니 그거 우리가 원조’라는 걸 깨닫기 위해서도 아니다. 역사는 족보도 아니고 등기부등본도 아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역사는 ‘외국사’가 아닐까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나라나 에도막부 시절 일본은 국가목표와 운영원리, 작동방식 모두 현대 대한민국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르다. 청나라와 현대 중국은 또 어떤가. 한족들에겐 황제라는 걸 강조하는 한편으론 여름마다 열하산장에 행차해서 만주와 몽골 귀족들에게 칸으로서 위엄을 세우던 청나라 지배층 모습은 현대 중국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이질적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에게 조선은 외국이다. 중국인에게 청나라는 외국이다. 일본인에겐 대일본제국이 외국이다. ‘國史’라는 일반쓰레기는 잠시 옆으로 치워놓고, 선조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설명과 예측보다는 이해와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재밌어지는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김치나 한복을 두고 이러저러한 헛소리가 나오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다. 맞다. 불쾌하다. 하지만 이웃이 술주정 부린다고 우리까지 똑같이 술주정 부린다면 제3자가 보기에 똑같은 술주정뱅이 두 명으로 비칠 뿐이다. ‘우리 조상은 위대했다’거나 ‘그거 다 우리거라는거 아시죠’라고 외쳐대는 게 열등감의 표현임을 떠올린다면 좀 더 대범하게 대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부러워해야 할 당사자는 총 한 자루 없이도 우주의 기운이 충만했던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던 촛불시민이 아니라 인구 10억 넘는데도 국가지도자 하나 제 손으로 못 뽑는 안쓰러운 이웃나라 신민들일테니까.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1191 | 추천: 1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가보안법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트루먼 쇼의 주인공과 닮았다. 언젠가는 그 허구를 깨달을 수 있겠지만 속고 사는 세상을 모른다. 그러니 비정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정상으로 간주하며 불편함이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들 있다. 국가보안법의 억압에 갇혀 금기를 잔뜩 마음 켠켠히 쌓고 사는 사람들이 금기를 가슴 속 깊이 묻고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잊고 산다.  국가보안법의 강요된 금기가 허구를 낳았다. 허구가 금과옥조의 진실이 되었다. 그 허구가 상식이 되고 주류가 되었다. 금기가 빚은 허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억압의 대상인 금기를 자각하고 이에 저항하여 금기를 대신한 허구를 깨뜨리는 순간 국가보안법이 만든 세상은 무너진다. 국가보안법이 만든 금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순간 죽음과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공포를 부르는 금기에 대한 문제 제기나 검증은 금물이 되었다. 금기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회피하며 모른 척해야 편하다. 금기를 대신한 허구를 받아들여야 아무런 위협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금기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 그렇게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 안에서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지내고 사는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억압과 공포에 길들여져 저항력을 거세당한 채 분단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영화 '트루먼 쇼'  국가보안법은 반미와 친북, 연북을 금기시한다. 반미와 친북, 연북을 억압하기에 그 대신에 친미와 동족대결이 진리로 둔갑하였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할 수도, 동족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지지할 수도 없다. 국가보안법이 억압하는 금기를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금기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세뇌되었기에 금기가 무엇인지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금기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무섭다.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연방제 통일, 주체사상, 선군정치, 강성대국 등등.  국가보안법이 주는 억압과 공포로 인하여 금기를 당연시하는 세상이다. 국가보안법의 억압과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어 금기에 저항하는 것이 어렵고 무서운 세상이다. 금기에 도전하기가 두려워 허구가 진리로 둔갑한 세상이다. 우리 앞에 놓인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에 복종하는 굴종과 복종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 온갖 궤변과 자기합리화가 난무하는 한국사회다. 악마와 같은 반북 메카시즘에 저항하기는커녕 동족을 악마화하고 폄훼하기에 바쁜 어중이 떠중이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상전의 주한미군 철수 협박에 놀아나 방위비 분담금 명목의 조공을 바치고도 한미동맹 강화를 예찬하는 머저리들이 부지기수다. 동족을 악마화하고 폄훼하며 비방하지 않고서는, 동족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존립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이 한국의 사회의 현실이다.  상전에 매달려 동족을 증오하며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국가보안법에 순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러하기에 국가보안법의 우리에 갇힌 우리의 일상은 비정상적, 비상식적, 비양심적, 비이성적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의 사상,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민생, 문화 등 전반에 지배적 영향력을 깊숙이 드리우고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금기에 도전하는 저항력을 키워나갈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한국사회의 근본과제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이 금기시하고 억압하는 금기들을 깨뜨려 나가며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에서 탈출할 때 맞이할 수 있는 제2의 해방과도 같은 일이다. 한국 민중이 도전해야 할 국가보안법이 강요하는 금기는 부지기수이기에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억압에 맞서 해야 할 일도 도처에 무궁무진하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03-24 | hrights | 조회: 1573 | 추천: 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2017년 작. 대략 내용 –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뉴욕타임즈의 ‘펜타곤 페이퍼’(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발주한 4천 장에 이르는 베트남전쟁 연구보고서) 특종 보도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힌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에 이르는 네 명의 대통령이 30년간 감춰온 베트남 전쟁의 비밀이 알려진다. 전쟁 상황은 불리한데도 미국 정부는 계속 승전(勝戰)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날리며 파병을 계속했다. 정부는 관련 보도를 금지시키고, 뉴욕타임즈를 국가기밀 유포로 인한 안보 위협을 이유로 법원에 기소하였다.  지금과 달리 뉴욕타임즈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워싱턴포스트. 편집장인 벤(톰 행크스)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담긴 정부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즈에게 제보했던 동일 인물에게 입수한다. 벤은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조작한 사실을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최초의 여성 발행인 캐서린(메릴 스트립)은 회사와 자신,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지역 신문이었다. 유능한 기자를 충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주식 상장을 고려하던 중이었다. 은행과 주주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캐서린을 설득한다. 보도하면 안 된다고. 스필버그의 연출력과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볼만하다. 무엇보다 식자공(植字工)이 활자를 찾아 넣는 과정과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는 언론의 자격을 묻는 장치로 등장한다. 영화 ‘1987’의 동일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전문적인 영화평은 넘어가자.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사진 출처 - 네이버  하나는 확인하자.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던 미국 언론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보도 태도 등과 꽤나 거리가 있는 영화의 설정이 그것이다.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 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 그리고 패배했다.”(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2, 이후, 2006)  1946년부터 8년간 미국은 베트남의 대프랑스 독립전쟁에서 프랑스의 전쟁 비용 80%를 댔다. 프랑스가 1954년 패퇴하자 1954년 응오딘디엠이라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앉혔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쟁 동안 모두 700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다. 베트남 국민 한 사람 당 거의 200킬로그램 폭탄 하나씩.  그 와중에 1968년 미군 중대 하나가 꽝응아이 성 미라이 마을에서 450~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한 병사의 인터뷰가 뉴욕타임즈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에서 간행된 미라이 학살 기사는 미국 언론에서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이미 미국은 베트남에 5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주둔시키고도, 20만 명을 추가로 파병하려고 했다.(영화에선 10만 명 더 파병했다고 한다.) 1971년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대대적인 폭격을 저질렀다.  공산주의 저지를 빌미로 한 미국의 침략전쟁은 처음부터 비판을 받았다. 민권단체는 물론, 징병 대상인 젊은이들은 이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온 벨트를 박탈당했다. 대학의 반전 운동도 계속되었다. 학군단(ROTC)도 거부했다. 가톨릭 수녀와 신부도 행동에 나섰다. 참전 군인들도 반전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도 1969년 대통령 닉슨은 “나는 어떤 반전 운동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났고, 2년 뒤 닉슨은 쫓겨났다. 닉슨은 물론 케네디, 존슨도 의회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지속했다.(영화에선 마치 대통령 독단인 것처럼 끌고 갔다. 아니다. 미국 의회는 역시 대외 침략, 간섭에서 언제나 정부 편이었다. 멕시코, 필리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이라크 어디서나. 닉슨 하나를 꼬리 자르고, 미국 대외정책 시스템은 계속되고 있다.)  영화는 예상대로 전개된다. 뉴욕타임즈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는 맥나마라 보고서를 보도하기로 한다. 그 결정은 언론사 사주(발행인이라고 부르는!) 캐서린(메릴 스트립)이 했다. 아무튼 캐서린은 돌아가는 윤전기를 보며 편집장 벤에게 말한다. “남편은 기사야말로 역사의 초고라고 했어요!” 역사학도인 나로서는 이런 말은 듣기 좋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주 캐서린은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오랜 친구로 나온다. 나는 캐서린이 보도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맥나마라와 나눈 다음 대화에 있다고 본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자각보다 앞서는 훨씬 보편적인 이유. 맥 : 보도 기사를 다 읽은 모양이군. 캐 : 그래. 다 읽었어. 네가 많이 힘들 거란 건 알아. 하지만 그 일을 왜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어.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 맥 : 언론은 우리를 그저 거짓말쟁이라고 쉽게 쓰겠지. 캐 : 상황을 계속 내버려 두었잖아? 내 아들은 고맙게도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넌 내 아들이 전쟁터로 가는 것도 봤잖아? 우리가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너는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많은 우리 친구들이 자식들을 보내는 걸 두고 봤어.  자식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보도하기로 결정한 건. 다만 이길 수 있다면 전쟁터로 내 새끼, 우리 자식을 보내도 되나? 그래도 되는 전쟁이 있나? 영광은 장군과 정치가가 가져가고, 이익은 군산복합체가 가져가며, 참전한 내 새끼, 우리 자식에게는 살아도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과 트라우마, 아니면 싸늘한 시신뿐이다.  둘째가 입대하던 날, 함께 갔다. 거기엔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문득 전쟁이 나면 저것들이 상한다는 걸 알았다. 저 꽃 같은 것들이. 내년엔 또 한 명의 ‘내 새끼’가 군대를 간다.  캠퍼스에 봄이 왔다. 오고가며 복작거리는 젊은 생명들 덕에 나도 들뜬다. 올해도 쑥스럽게 교실 뒷켠에 자리 잡은 복학생들이 있었다. 안 오실 걸 알면서도 앞쪽으로 앉으시라고 권해본다. 앞으로도 봄이면 군대 갔던 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실로 돌아오는 세상이 계속되도록 아니, 군대를 가든 안 가든 사는 데 별 상관없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1-03-17 | hrights | 조회: 1057 | 추천: 6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모든 언어의 경계는 모호하다. 구체적 사물 언어가 아닌, 추상적인 상태 언어일수록 그 경계를 확정 짓기 힘들다. 사람마다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기에 그 다름들이 서로 충돌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화하면 할수록 경계는 느슨해지고 공유지점은 더 확대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계도 그렇다.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자리 잡은 이래 물리적 국경은 여전히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정신과 문화는 국경을 넘어서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전 세계가 이미 물리적 경계를 넘어섰다. 국경을 둘러싼 소규모 분쟁들이 아직 빈번하지만, 세계가 초연결·탈민족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경 중심의 기존의 국민국가체제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신적 경계가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어야 한다는 글을 몇 차례 쓰기도 했는데, ‘점선’이라는 은유로 현재의 세계 개방성과 국가의 정체성을 두루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국민국가 단위에서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모든 것들에 이러한 점선적 의식이 필요하다.  보훈 분야를 보면서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근대적 보훈 정책은 국민국가 체제를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면서 다시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문제는 강화된 국가주의들이 다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기존 국가주의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보훈이 미래에도 본연의 목적을 유지하려면 국가의 정신적 경계가 ‘실선’에서 ‘점선’으로 개방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세계 상황에 어울려야 한다. 그러려면 기존 국가유공의 성격과 범주를 변화시켜야 한다. 국가의 수호와 유지에 공헌해온 이들에게 다방면으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이면서 국가유공의 범위와 성격을 개방적으로 재해석하고 확대시켜나가야 한다. 보훈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 보자.  보훈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宣揚)하고 그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삶과 복지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행위이다(국가보훈기본법 제1조 목적). 이 규정의 키워드는 ‘국가’, ‘희생’, ‘공헌’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선양’, ‘애국(나라사랑)’이라는 두 낱말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문제는 이런 키워드들에 대해 일반 국민은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저마다 열심히, 때로는 치열하게 살지만, ‘국가’를 위해 딱히 ‘희생’이나 ‘공헌’을 한다는 의식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소 특별한 희생과 공헌의 사례를 일반 국민의 애국심 함양으로 이어가려는 정부의 시도가 ‘국가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데서 오는 불편감도 있다.  성격상 국가주의적인 ‘보훈’이라는 말이면 충분한데도 각종 법령에서는 물론 연구자들조차 ‘국가보훈’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개인주의에 기반한 세계적 초연결의 시대와 겉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면서 보훈을 대중화, 일반화시키려는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국가보훈’의 의미와 목적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국가중심적 보훈 정책은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을까. 보훈이 국가 전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면서도 시대적 흐름과 괴리되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도 현실이다. 보훈의 정책과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잡아나가야 하는 것일까. 보훈이 국민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국가유공자의 명예와 함께 지속가능성도 담보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근대 이후 회자되어온 국가는 이른바 ‘국민국가’를 의미한다. 국민국가는 영어로 nation-state이니, 민족국가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 근대 국가의 형성이 민족주의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해왔다는 뜻이다. 민족의식과 영토의 경계를 전제로 하는 근대국가 형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보훈에 담긴 국가주의적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잡아가야 할지 그 우회로도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민족주의는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민족의식은 억압과 피지배에 대한 대항 정신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항 과정에 겪은 희생에 대한 공감이 다시 민족의식을 북돋운다. 가령 수십 개의 영방국가(Territorialstaat)로 나뉘어 있던 옛 독일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피해 의식이 커졌고, 이 피해 의식이 영방국가들을 연대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프랑스에 점령당한 베를린에서 피히테(J. G. Fichte)는 독일의 각 영방이 독일어와 독일문화 교육을 강화해 상호 연대 의식을 함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 내용을 담아 “독일 나치온(민족/국민)에게 고함”(1808)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했다. 강력한 공동의 적이 출현하자 뚜렷한 동료의식이 없던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의 희생을 떠올리며 연대적 공유의식이 생겨나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와 비슷하게 프랑스의 르낭(E. Renan)은 독일에 패배했던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나시옹(민족/국민)이란 무엇인가』(1882)를 저술했다. 르낭은 이 책에서 “나시옹(민족/국민)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노력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오랜 과거의 결과”로서, “나시옹은 사람들이 과거에 했고 또 앞으로도 하려는 의사가 있는 희생의 감정으로 구성된 위대한 연대감”이라 규정했다. 민족/국민의 개념이 적의 도전에 희생을 무릅쓰고 연대하던 이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히테가 “고귀한 사람은 기꺼이 나치온(민족/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웅변을 한 것과 통하는 대항 의식을 잘 보여준다. 르낭과 피히테 모두 민족/국민 개념의 밑바탕에서 구성원들의 저항에 의한 희생의 감정을 보면서, 이 희생이 민족/국민의식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문제는 국민의식이 커지면서 국가는 견고해지지만, 동시에 이 국민과 저 국민이 서로 부딪힌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것이 집단중심주의를 동일성의 논리로 포섭해 구성원들을 통일시켜 가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에 대해서는 적대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체제인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이 지난 이제 이 두 나라는 ‘유럽연합’ 체제 속에서 더 이상 부딪히지 않고 부딪혀서도 안 되는 환경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한때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던 철천지원수들이 교류와 협력이 서로 살길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었다. 지금은 같은 화폐를 쓰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지내고 있다. 이 두 국가만이 아닌 유럽연합 체제에 있는 국가들이 비슷한 상황 속에 있다. 전반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견고한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견고한 경계에 기반한 적대성이 느슨해지고 탈경계적 이웃으로서의 의식이 커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훈의 경우는 어떤가.  한국 보훈의 기초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과 그 과정에 겪은 희생, 북한과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 같은 것이 놓여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민족의식을 유기체적으로 통일시키고 구성원들을 하나로 고양시키면서 하나의 국민국가로 형성되어온 측면이 크다. 한국만이 아니라 여느 나라든 이러한 구성원 간 의식의 통일을 경험하면서 오늘의 국가를 형성하는 동력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전 세계가 기존의 국경 개념을 지키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다문화, 초연결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다. 국경은 있으되 그 너머로 이루어지는 교류의 폭이 더 크다. 우리도 한때는 그렇게 저항했던 일본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수백만의 사상자를 내며 전쟁까지 치뤘던 북한과 평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천문학적 규모의 교역을 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이 2020년 기준으로 220만 명이나 되고, 3만3천여 명의 탈북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대중 매체에서는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온라인상에서의 급격한 지구화 현상은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한 현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IT를 선도하는 한국이 지구적 다양성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한국도 초연결, 탈민족,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대립적 저항 의식과 희생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국민국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기반한 애국정신이라는 것이 일반인에게 좀 더 현실감 있게 와 닿지 않으면 이른바 국가유공자도 일반 국민과 무관한 특수한 신분이나 영역에 있는 사람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국가유공자를 포함해 85만 명에 이르는 보훈대상자들에 대한 존경심은커녕 애국정신의 함양이라는 각종 정책과 행위도 ‘형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어떤 때 애국가를 진심으로 우렁차게 부르게 되는 것일까. 앞으로 그런 때가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보훈을 둘러싼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 이 글의 본론은 「일간투데이」 “2021년 보훈의 재조명”(2021.03.08)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3-10 | hrights | 조회: 939 | 추천: 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고 노래하지만, 하이에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하이에나도 신선한 고기를 좋아한다. 다만 남이 사냥해 놓은 걸 빼앗을 뿐이다. 하이에나가 먹이를 빼앗는 대상은 초원에서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육상동물 최고의 주력을 자랑하는 (그러나 빅캣-bigcat-중 서열이 가장 낮은) 치타는 물론이고, 먹이를 나무 위에 숨기는 영리한 표범도, 심지어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도 하이에나의 강도 범죄 피해자가 된다. 떼를 지어 몰려드는 하이에나들에게 암사자 서너 마리쯤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이에나는 달리기가 느린 대신,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강력한 이빨과 턱, 먼 곳의 피 냄새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후각, 탁월한 조직력과 협동심,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아프리카 사바나의 무법자로 군림한다. 윤석열 검찰은 하이에나였다  촛불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자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우리는 지나왔다. 지금은 하이에나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어둠의 시간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윤석열 검찰은 하이에나였다. 뼈까지 으스러뜨리는 강력한 이빨(수사권)과 턱(기소권), 유죄 심증을 끝까지 밀어붙여 탈탈 터는 끈기, 일사불란한 조직력과 협동심을 자랑하는…, 하이에나였다. 특히 윤석열 개인의 행태는 하이에나와 더욱 흡사하다. 자기 새끼(한동훈)와 식구들에 대한 끔찍한 사랑(조직이기주의), 스스로 자기 먹거리를 구하는 생태계의 규칙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무법자 행태(감찰 및 수사 방해),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를 즐기며 검찰총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뻔뻔함, 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이중인격(내로남불) 등 생존을 위해 최적화한 하이에나를 보는 듯하다. 약육강식의 초원에선 미덕일지 모르겠으나 개명한 민주주의 국가의 검찰총장으로는 적절치 않은 악덕들이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론’의 기만성  그런데도 윤석열이 버티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이 명분을 위해 검찰은 생명의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사냥감을 찾아다녔다. 윤석열 검찰이 내세우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가 가소로운 이유는 기만적인 눈속임에 기초한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대한 열망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이 눈에 뻔히 보이는 정권의 비리조차 봐주기로 일관해서 생겨난 여론인데, 검찰개혁을 위해 권한을 내려놓는 리버럴 정권이 되면 없는 사건도 만들어내겠다는 투지로 과도한 수사를 벌인다. 이전 정부의 과오가 쌓여 높아진 요구를 리버럴 정부가 되면 거꾸로 조직 보위의 방패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차를 활용한 일종의 야바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권력만을 물어뜯던 하이에나가 스스로 싸움을 포기한 사자에게 몰려들어 ‘우리도 살아있는 권력을 공격할 수 있다’고 으스대는 꼴이다. 비루한 외모의 하이에나가 초원의 무법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강약약강’의 비굴한 처세에 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로서 공직 사회의 부패 방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이고, 선출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많은 국민이 분노하는 대상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 자체가 아니라, 자기 조직의 생존을 위해 국민이 위임한 수사권을 남용하는 윤석열 검찰의 과도하고 편향적인 행태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검찰개혁 속도조절론이라는 유령  대한민국 국민은 역시 현명해서 윤석열 검찰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고, 더욱 철저한 검찰개혁을 주문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특위를 띄우고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수사청 설립 작업에 착수한 배경이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청와대와 정부여당 일각에서 먼저 속도조절론이 흘러나왔다. 최초 출처로 지칭되는 문재인 대통령의 워딩을 몇 번이고 읽어봐도 그게 왜 속도조절로 읽히는지, 속도조절이라면 몇 km까지 줄여야 한다는 건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대놓고 부인하지 않으니 대통령의 속뜻이 그러하다고 짐작할 뿐이다. 대통령의 화법과 소통방식과 현실인식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수사청 설립 국면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지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지하다시피 문재인 정부는 공수처와 검경수사권조정 정도에서 검찰개혁을 멈추고 싶어했다. 검찰개혁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공을 논한다면, 무리한 수사권 남용으로 근본적인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한 윤석열과 수사-기소 분리를 주창한 시민들의 용기에 돌려야 한다. 여태 손 놓고 있던 청와대가 법안 발의를 눈앞에 둔 지금 와서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는 주제넘은 주장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4·7 재보궐선거에 관계없이 정부여당이 수사청 설립 방안을 다시 꺼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한 달이 지난다고 시기상조론의 조건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오만하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선거에서 지면 동력이 없어서 못 할 것이다. 통과 시점을 못 박은 것은 섣부른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법안 발의조차 못 하게 해서 논의 자체를 틀어막는 건 폭력적이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남은 개혁 카드가 이렇게 허공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수사청 설립 반대 금태섭의 자가당착  청와대와 법무부가 속도조절론이라는 공을 쏘아 올리자 친검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인 척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각종 괴변과 아전인수로 드리블을 이어가고 있다. ‘헌법 정신 파괴’ 운운하는 윤석열의 무식함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모든 주장을 반박할 여유는 없고, 대표 격으로 금태섭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나는 그의 주장이 자가당착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지만, 뒤집어보면, 수사청 설립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논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민주당의 검찰개혁 방안이 “공수처, 국수본, 중수청 등 수사기관을 오히려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금태섭이 공수처 출범을 반대하며 펼쳤던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중대한 전제가 깔려 있었다. ‘검찰의 수사권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공수처를 설립할 경우’라는 전제 말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수사청 설립 방안은 검찰의 수사권을 없애고 기소권만 남기겠다는 것 아닌가. 검찰의 수사 기능을 공수처와 수사청이 나눠 갖게 하고, 경찰의 수사 기능은 자기 완결적인 형태로 국수본이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사 총량은 0으로 수렴된다. 수사 총량이 늘어난다고 공수처를 반대했던 그의 주장대로라면, 검찰의 수사권을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수사 총량이 늘어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논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수사청 설립 방안이 잘못 꿴 검찰개혁의 첫 단추를 다시 끼우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금태섭은 제 논리로 제 발등을 찍고 있다. 검찰병에 걸린 환자들  금태섭은 또 검찰의 경찰 수사 지휘권에 대해 “검찰이 직접 수사를 못 하게 하면 그 대신 경찰에 대한 통제는 강화해야 한다. 검찰의 권한 남용보다 경찰의 권한 남용이 평범한 시민에게는 훨씬 큰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경찰의 권한 남용이 평범한 시민에게 훨씬 큰 문제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통제의 주체가 꼭 검찰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실은 검찰주의자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경찰이 자체 종결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검찰이 아니라 경찰수사심의위원회 같은 민간위원회를 명실상부하게 운영해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더구나 금태섭은 검찰이 기소권을 통해서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사실상 수사지휘)할 수 있다는 점을 (아마도 일부러) 빼놓고 말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나는 대한민국 검찰이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60년 묵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금태섭의 행태 역시 검찰병 환자의 그것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모든 판단 기준에 검찰을 중심에 놓거나, 검찰이 중심이었던 과거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소유지불가론이나 거악척결론을 비롯해 검찰이 만들어낸 모든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유아독존적 발상이다.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  드라마 <하이에나>의 주인공 정금자(김혜수)의 대사는 정곡을 찔렀다. “하이에나 똥이 왜 하얀지 알아? 썩은 거든 산 거든 뼈째 씹어 먹거든.” 대한민국이라는 초원에서 검찰은 보수든 진보든 뼈째 씹어 적색도 청색도 아닌 백색의 물질로 만들어 버린다.  밤이 깊어가고 어디선가 하이에나들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이에나를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리를 흩트려놓는 것이고, 검찰을 정상 국가조직으로 돌려놓는 유일한 방법은 권한을 분산하는 것이다. 초원에서 그 일을 감당할 자는 사자밖에 없고, 한국 사회에선 국민밖에 없다.  사자 무리를 영어로 프라이드(pride)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 사자를 숭배해온 서양인들의 긍지가 배어있는 작명이다. 부디 한국 사회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를 지닌 프라이드가 되길.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깨달음을 되새기며 심호흡을 할 수밖에. “판타 레이(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밤은 낮이 되고, 심장이 작아진 하이에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3-03 | hrights | 조회: 3129 | 추천: 35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나와 비슷한 30대 또래들의 대화 주제는 주식이다. 주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어 주식을 하지 않는 친구들은 마치 시대적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뒤처진 사람처럼 여겨지거나, 돈에 대해 금기시하며 혼자 고고한 척하는 ‘씹선비’ 취급을 받는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주식투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식투자로 인해 주식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다양한 기업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몇몇 자본가들에 의해 기업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적더라도 가치 있는 업체들이 안정적으로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주식을 막 시작한 ‘주린이’들은 주식을 매개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관심 갖는 사회적 가치는 돈과 경제(특히 내 돈)에 한정돼 있다. 기업의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도, 국제정세와 국내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대개의 경우 내 돈이 얼마나 불어날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배팅을 하는 것 같다. 경마에 돈을 걸듯이, 스포츠토토를 하듯이 주식을 한다. 경마도 말과 기수의 실력을 분석하고, 스포츠토토도 각 팀의 경기력을 꼼꼼히 분석해야만 승률이 높다. 처음엔 재미 삼아, 경험 삼아 적은 돈을 넣어보다가 생각지 못한 수익을 내기도 하고, 승패를 분석하는 재미가 들기도 해서 점점 더 판을 키운다. 주식을 하는 것인지, 도박을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투자하는 대상만 다를 뿐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한다는 ‘영끌’에, 빚을 내서 투자한다는 ‘빚투’까지, 20~30대 청년들의 삶이 도박과 같은 주식투자로 물들어 가고 있다.  “10년 이상 보유할 주식이 아니라면 10분도 투자하지 마라” (워런 버핏), “주식은 사고 파는 게 아니라 모으는 것이다” (존 리) 라는 주식 명언에 감탄하다가도, 수익이 주식투자의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이름난 투자 귀재들의 조언도 무의미한 듯하다. 아침 9시, 장이 열리는 순간, 오늘은 얼마가 오르고 떨어졌는지, 밤사이 내 돈은 무사했는지, 언제 주식을 빼야 하는지 체크하는 게 직장인들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사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사회의 책임이 크다. 실제로 주식에 뛰어든 지인들을 보면 “이렇게 월급만 받아서 살다간 아무리 수십 년을 일해도 집 한 채 살 수도 없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직장인이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30년 이상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상황에서 월급만 받아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현실이 대규모 ‘주린이’를 양산한 것이 아닌가 싶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노동 없는 부가 동경의 대상이 된 사회에서 주린이들이 꿈꾸는 대박주의 기회는 찾아올까? 과거를 반추해 보면 70~80년대 땅 투기로 대박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부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다시 30년이 지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대박을 꿈꾸게 될까? 노른자 땅을 노리던 시대에서 대박주를 좇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향해 왔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2-24 | hrights | 조회: 881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