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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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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심판 선고기일 결정을 기다리며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54
조회
463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어느 시인


토요일 오전 11시쯤, 전화가 왔습니다. 시를 쓰는 친구였습니다.


“오늘… 나와야지?”


오늘은 3월 4일, 19차 촛불집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집안 일 때문에 참석을 못 할 것이라는 저의 말에 그는 조금 아쉬워하는 듯했습니다.


“할 수 없지, 뭐….”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 18차 촛불집회가 이어져오는 동안 한 번도 저에게 참석 여부를 묻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조금 특별한 전화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혹시, 어느 친박단체가 주장한 ‘세계 역사상 최대의 인원’이 모였다는 지난 삼일절 ‘탄국기 집회’ 직후라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친구였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특별히 오늘 집회 참석하느냐고 묻는 거야?”


그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집회잖아.”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탄핵 인용 전 마지막이 될 촛불집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는 저 역시 당연히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숨쉬기도 미안한 4월’을 해마다 겪고 있는 그는 서울에서 거의 세 시간 거리쯤 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한 번도 빠짐없이 토요일 오후 두 시 반쯤이면 어김없이 광화문광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이 마지막 집회가 될 것이니 그동안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부끄러움 많은 소년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모든 것에 범박한 저로서는 부끄럽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2. 어떤 수필가


지난 1월 말경,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시중에 절판된 그분의 저서와 인터뷰 모음집을 헌책방에서 구매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정회원입니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라는 자서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여섯 권의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출판업자임에도 저는 아쉽게도 그분의 저서 중, 단 한 권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심경 고백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 마음의 여정>(1995)이라는 책입니다.


표지에 붙어 있는 띠지에는 ‘대통령딸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 그리고 진솔하게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여정-순리대로 나타나는 사계절에 자연이 순응하듯 순리대로 펼쳐지는 인생의 여정에 순응하며…’ 라는 카피가 눈에 띕니다. 이 책에는 ‘율리아나’라는 가톨릭 세례명과 선덕화(善德華)라는 불교의 법명을 함께 가진 분인 만큼 유불선을 넘나드는 사상만큼이나 자유로운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저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그 글들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어서 제가 가진 책에 쓰인 그대로를 조금 인용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큰 힘 또는 권력의 비호 아래 지내왔거나, 뭐든지 다 들어 주는 부모의 보호 아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자란 사람들은, 그 권내를 벗어나면 참으로 비참한 지경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 분노를 다스릴 줄 모른다.


자신의 뜻대로 되었던 세상과는 달리 이제 사사건건 방해와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 그 안에서 조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인내심을 일시에 잃어버리고 극도의 분노에 달하기 쉽다. 그리하여 약간 구부려도 될 일도 꺾어버리고 제동기를 밟아야 할 때 가속기를 밟고…….
-[인생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중에서


남을 열심히 괴롭히는 자는 자기가 들어가 묻힐 굴을 열심히 파고 있는 중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런다지만 자기의 업장은 나날이 두꺼워진다. 남이 고통을 준다지만 사실 결정적인 최대의 고통과 타격을 줄 수 있는 자는 자기 한 사람뿐이다. 분노에 눈이 멀어, 자만심에 그 누구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아, 쾌락에 정신을 잃어, 곧 닥칠 수치와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를 파멸시키는 길로 달려간다. 이런 일은 하늘도, 부모도, 그 누구도 막아 줄 수 없는 일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샐까] 중에서


사족. 경박한 출판업자


생각보다 헌재의 심판 선고일 지정이 늦어져 싱숭생숭한 마음에 ‘구간소개’를 했습니다.


지난 2012년 10월, 저는 뜬금없이 찾아온 출판브로커 아무개로부터 책을 한 권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재출간이지만 서둘러 이 책을 내면 대박이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박이 나면 수익금의 얼마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받은 책이 <박근혜 심경 고백 에세이, 내 마음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때 책을 냈으면 돈 좀 벌었을까요? 아무튼 당시 박근혜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저는 박근혜보다, 영세 출판업자들에게 브로커질이나 하며 돌아다니는 그 아무개 같은 사람이 너무 싫어서 단박에 거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토요일 이후, 한 시간이 일 년 같습니다. 시인 친구처럼 담담해야 하는데, 수필가 그분처럼 순리에 순응하며 기다리면 되는데…. 저는 참 어렵기만 합니다.


헌재는 언제 탄핵심판 선고기일을 발표할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