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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實感)의 시절’을 사는 희망 (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45
조회
482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게 있을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단했던 진리도 시대가 변하면 물렁해지거나 부서진다. 영원하리란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거나 사라진다. 권력의 철옹성도 쇠하거나 허물어진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권세가 높다한들 오래가지 못한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거의 모든 진리, 가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역사적인 것들은 시간의 침식을 거치면서 상대화된다. 기실, 역사 자체가 고정불변의 정태(靜態)가 아니라 가변적인 동태(動態)이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없다면 역사의 변화도 없다


항상(恒常)과 영원(永遠)이 없으니 역사 세계의 만물(萬物)은 가만 놔두면 알아서 유전(流轉)할까?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도 역사는 저절로 변할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소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역사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 위에 생각을 쌓는 데 일가견이 있던 철학자 헤겔조차 인간의 정열이 없다면 세계사는 이성의 자기실현과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역사의 변화는 자연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 생겨난다. 노예제만 봐도 그렇다. 노예제도가 원래 나쁘다는 선험적 윤리 따위는 없었다. 노예들이 예속과 굴종을 거부하면서부터 노예제는 타파되어 마땅한 악이 되었다.


역사적 변화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인간은 지구에 살지만 지구의 모든 일을 다 볼 수 있는 지구만한 눈을 갖고 있진 못하다. 장구한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숱한 변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할만한 역사의 눈을 갖추기도 어렵다.(그 어렵고 힘든 일을 해냈다고 자부한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자부’를 ‘자뻑’=자만으로 바꿔 읽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크고 근본적인 역사적 변화일수록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의 불완전성, 역사적 변화의 심대함 말고도 역사적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역사적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농간(弄奸)을 부리기 때문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의 농간


작가 최인훈의 역사적 통찰에 기대어 말하자면, 옳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하더라도 역사가 저절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그런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옳은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그 정의로운 다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역사에 없다. 만일 거짓이라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불의와 혼란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옳지 않았거나 그런 민중의 요구가 약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득세했는가, 87년 6월 항쟁에서 내건 군부독재의 종식이 정의롭지 않아서 노태우정권이 들어섰던가, 과연 ‘세월호’ 진상을 규명하려는 요구가 부당하고 약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변화가 일어나면, 자기 정체가 탄로 나서 손해를 보는 자들은 역사적 변화를 방해하려 했다. 거짓이 밝혀져서 문제가 풀리면 밑지는 자들은 한사코 거짓의 힘으로 현상유지=사실상 역사적 반동(historical reaction)을 획책해 왔다. 그들은 변화를 ‘무질서’ 혹은 ‘혼란’으로 매도해 왔다. 통제할 수 없는 변화로 인해서 자신이 누려온 ‘신성불가침’의 특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백날 (탄핵을) 외쳐봐라,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촛불을 들어봐야 너만 손해고, 너 인생만 고달파진다>, <지금부터 진실과 민주를 운운하는 자들은 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이다>라는 수사적 무기를 동원한다. (앨버트 허시먼(A. O. Hirshman)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에서 이와 같은 수사를, 프랑스혁명 이후 서양의 기득권 세력이 구사한 대표적인 세 개의 “반동명제”라고 손꼽은 다음에 각기 <무용(無用)명제>, <역효과명제>, <위험명제>로 명명한 바 있다.)


남과 다른 특권을 누리려는 기득권 세력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의 옹호자들이다. 그들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고, 수용할 생각도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법전 바깥의 현실로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언필칭 오피니언 리더니 퍼스트 레이디였다느니 경제성장의 주역이니 해대며 현실세계에는 <지도하는 주체인 나-지도 받아야 할 남>이라는 차별이 있는 게 정상이라고 농간을 부린다. 자기들처럼 믿는 자들은 정상이고 순수이지만, 믿지 않고 현실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순하고 위험하니 ‘발본색원’하여 격리 · 배제 · 처벌하려 든다.


20161214web02.jpg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실감(實感)은 수사(修辭)보다 힘이 세다.


그러나 정작 위험하고 착란에 빠진 무리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개돼지 취급한 대다수 국민들이 ‘니들이야말로 치료제라고 우기는 병균’임을 이미 감지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지들이 내세운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의 뜻을 대의할 능력은 고사하고 애당초 그럴 의사와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을 경시하거나 호도하려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녀노소는, 이제 기득권 세력이 인민주권을 불완전하게 대의하는 게 아니라 대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촛불집회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거나 않았더라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봤다. 민주공화국의 참된 뜻과 인민주권의 힘을 실감했다. 물론, 개인적 삶에서건 역사의 변화에서건 일다운 일이라면 그게 저절로 쉽게 될 리 없다. 응당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리했더니, ‘따로 또 같이’ 촛불 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더니, 역사가 조금 변하더라는 것을 실감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이로운 실감(實感)이야말로 저들의 경악스런 수사(修辭)를 물리칠 최대의 무기다. 그러니 허투루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될 줄 안다. 아직 ‘실감의 시절’이 ‘실제의 시대’가 되기 않았으므로! 희망과 절망은 고작 한 글자 차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2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