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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상상 (권보드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7
조회
558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가끔 애 키우고 살림하는 일에, 가족 안팎의 관계에 치일 때면 10년만 참으면 되겠거니 생각한다. 10년 지나면 윗세대는 80대고 애들은 둘 다 20대다. 눌리고 돌볼 위아래가 느슨해지는 셈이다. 어른들이 편찮으실까 걱정이지만, 효가 지상 최대의 가치인 조선시대는 아니잖은가. 10년 후면 아직 50대 중반, 인생을 새로 시작해도 될 나이다. 마음껏 공부하고 멋대로 여행도 다녀야지. 죽는다는 과제에 대해선 일흔부터 골똘히 생각해 보고.


이대로 별일 없이 생활이 굴러갈 때의 시나리오이긴 하다. 병원 들를 때 이런저런 경고도 받게 됐고, 사고와 재해와 전쟁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좀먹고 있으니, 기대 수명이란 한낱 허구이기도 쉽다. ‘4월은 잔인한 달’이란 「황무지」의 시구는 1차 대전 후, 탄식이자 예언과도 같은 말이었던가. 화창한 봄에, 벨기에 테러 소식에 이집트 항공기 납치 사건이 이어진다. 남북 간 대결 국면은 어느덧 익숙해져 좀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2년 전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더더구나 드물다. 헤아리기 버거운 불행 속에서, 그래도 기대 수명을 점치고 인생을 계획한다.


몇 해 전 ‘죽음의 시계(deathclock)’라는 사이트가 화제일 때 조카딸이 내 종생의 시기와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아흔 몇 살 때 파도에 휩쓸려 죽는다나. 웃어넘겼지만 아흔 몇 살도 무섭고 파도도 무서웠다. 지금껏 아흔 몇 살은 아무래도 두렵다. 백세 인생이 코앞이라지만, 죽을 때까지 쓸 만 하고 죽을 때까지 할 일 확실한 인생이 얼마나 될까.


90대 중반인 고모할아버지 한 분은 거동을 못한 지 20여 년째다. 무릎 관절 수술을 한 것이 잘못됐다던가, 작은방 한 칸서 종일을 보내신다. 조용하고 사려 깊어 처조카들 집까지 너그럽게 챙기던 분이었는데. 80대 후반의 시이모께선 이른바 치매, 인지장애를 앓는 중이다. 남편마저 못 알아보는 일이 자주 있어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야 했다. 자태가 빼어나 젊은 시절엔 담 너머 기웃거리는 남학생이 한둘 아니었다던데. 주변 어른들이 70대를 넘기기 시작한 후, 그 밖에도 뇌졸중이며 파킨슨씨병이며, 온갖 병명이 흉흉하게 울린다. 늙기도 설워라커늘.


부모 상 다 치른 후 근 환갑에 자유분방한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 이탁오를 떠올린다. 노년에야 바라던 대로 살았고, 결국 여든 가까운 나이에 감옥에서 자결한 그 인생은 노년의 관습을 멋지게 비껴나간다. 브레히트 소설 속 “마지막 빵 한 조각까지” 알뜰히 챙겼던 할머니도 있다. 여든쯤 남편과 사별한 후 꽃단장하고 유랑패 따라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던가. 1백 세가 되도록 정력적으로 활동한 철학자 가다머도 생각나고 죽음까지 의연하게 처리한 니어링 부부도 기억난다.


i.aspx?Guid=f67c3d69d83746bbb8c26739ac33e0dd&Month=201511&size=640사진 출처 - 한국일보


그래도 노년은 두렵다. 퇴직도 늦고 연금도 탄탄하리라는 직장을 꿰 차고도 그렇다. 내가 별 필요 없어졌다는 자의식을 어떻게 견딘다지. 지금은 가족도 있고 직장도 있어 그 때문에 삽네 하지만, 그런 알리바이가 다 사라진 후엔 어떻게 숨을 쉰다지. 노인도 일할 거리 있는 농경 사회도 아니고, 요령과 지혜야 이젠 인터넷 담당이고. 점점 외로워질 테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삐걱거릴 텐데. 세월은 내 지식과 신념을 넘어 줄달음질 칠 텐데.


벌써 3년여 전 대통령 선거 직후, 6‧70대들과 만나 연속 인터뷰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적이 있다. 선거 전부터, 평생 야당이었던 어른들이 이번에야말로 기호 1번을 찍고 싶노라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던 터다. 왜 그런지 다 묻진 못했고, 답을 들어도 이해하진 못했다. 대부분 그분들 자신이 자기 행동의 속내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우울과 분노와 배반당한 세월, 그건 정치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릎 맞대고 오래 대화하다 보면 속내가 조금은 짐작될까 싶었다. 그것 하나 못하고 무얼 하랴 싶었는데.


실제론 아버지나 시어머니와의 대화도 힘들어하면서, 해가 바뀌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는다. TV를 켜면 온통 젊은이 세상, 가끔 노년의 분위기가 어른거려 채널을 멈추면 어김없이 TV 조선이거나 채널 A다. 내가 노인이라도 그쪽에 채널을 고정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이유가 뭐든 노년에 말 걸어주는 게 그쪽밖에 없다면. 밖에선 여전히 바쁜 척 하지만 텅 빈 집안, 속삭여주는 존재가 TV밖에 없다면.


히틀러라면 마침내 노년도 치우고 싶어 했을까. 장애인을 안락사시키고 유태인을 수용소로 몰아넣었듯. 누가 유용한 존재고 누가 쓸모없는 존재인지 결정하는 권력은 어느 손에 있는가. 알파고까지 등장하고, 유용성이란 기준에선 인류 전체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지금, 헌데 그 너머는 왜 이리 보이지 않을까. 함께 일구는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뭇 교과서 같은 발언은 왜 더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그나저나, 나이 먹어 좋다고 쓰고 싶었는데 원. 주름살이 곱게 자리 잡히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런. 7‧80대 어른들께도 균형 잡힌 삶을 기원하고 싶었는데. 백세 인생이라는데, 겨우 반환점이라는데 몽롱한 우울에나 첨벙거려서 어쩐다지. 지금 못하는 건 앞으로도 못하는 걸까. 10년 후부턴, 그때부턴 정말 자유롭게 늙어가고 싶은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