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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냄새가 싫다고? 그럼 가을을 포기하던가 (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00
조회
515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은행잎은 애초에 노랗지 않다. 봄볕이 무르익을 때 쯤 연두색 아주 여린 이파리로 태어난다. 한여름의 뙤약볕. 심지어는 아파트 창문까지 날리는 태풍까지 다 받아내고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일생을 나무에게 필요한 엽록소를 공급하기 위해 제 할일을 다한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의 계절이 되면 나무는 이제야 스스로 겨울날 걱정을 한다. 나뭇잎이 나무 본체로부터 영양분을 받았던 유일한 통로인 떨켜를 막는다. 나무 본체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 추운겨울 내가 살아야겠으니 너는 이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아침드라마에서 나오는 아주 못된 배우자의 대사 같은 것이다. 매정한 이별통보 혹은 절교 선언이다. 신호를 받은 나뭇잎은 그제서야 이별을 준비한다. 더 이상 나무 본체를 위해서 광합성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사랑의 대상을 잃은 나뭇잎은 서서히 말라간다. 제 몸속에 남겨두었던 초록의 엽록소가 점점 옅어지고 노란색 낙엽으로 변한다. 봄날 태어날 때부터는 카르티노이드라고 하는 노란색 색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무의 일원이 되어서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위해서 노동했던 그 순간에는 단 한 번도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나무 본체와 이별하고 난 뒤의 단 며칠 혹은 2,3주 그제서야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참담한 이별의 결과다. 그게 우리들의 책갈피에 곱게 모셔둔 노란 은행잎의 실체이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자꾸 낮은 곳으로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가을엽서. 안도현 -


은행잎이 거리를 뒹구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게도 지구가 가지고 있는 중력이란 것 때문이다. 지구 가장 깊은 곳의 중심에서 모든 사물들을 낮아지라고 잡아끄는 힘이다. 그 중력 때문에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은 땅위를 걷는다. 지구상의 모든 자연이 사는 모든 행위들은 모두 이 중력의 힘에 의존한다. 너무도 당연해서 일상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사실 높은 곳은 다 위태롭다. 보기만 해도 까마득히 솟아있는 대형교회의 십자가도, 어둠의 군주 사우론의 성(城)을 닮은 주상복합 아파트 꼭대기도, 나도 좀 살려달라고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오르려 한다는 한강대교의 아치도 모두 위태롭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높은 곳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니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 높은 곳으로 간다. 나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인간들이란 자기가 믿는 신을 가장 위태로운 하늘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같은 종족들을 얼마나 많이 착취해 왔는가 말이다. 나는 다시 신이 있다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에 의해 삶을 보장받고 중력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은행잎은 죄가 없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적도 없고 원해서 사라지는 적도 없다. 오직 나무 본체만을 위한 끊임없는 노동을 해 왔을 뿐이다. 그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은행이라는 열매로 맺어진다.


00540995901_20151003.JPG사진 출처 - 한겨레


똥 냄새라고 했다. 은행잎의 숭고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인간의 발끝에서 뭉개지면 풍기는 지독한 냄새다. 가을 바람맞은 풀섶이거나 메뚜기 폴짝대는 잔디밭이거나 냇물 졸졸 흐르는 도랑가에만 떨어졌다 해도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았을 터이다. 썩을 수 없어 돌아갈 고향도 잃어버리게 만든 시멘트 바닥을 깔아 놓은 것도 인간이다. 서울시만 해도 11만 4천 그루나 되는 은행나무가 스스로 손들어 가로수가 되겠다고 자원 했을 리 만무하다. 허니 은행의 똥 냄새가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바닥을 아니 도시 전체를 온갖 콘크리트로 도배해놓고 경제성장 축제(economic growth festival)를 벌이기에만 여념이 없는 인간들의 치졸한 욕망의 냄새에 비할 수 있을까. 서울시는 은행 열매가 열리는 암컷나무 3만여 그루 중 매년 300그루씩을 제거하기로 했단다. 올 가을이 더 슬퍼지게 생겼다. 대지와 겨우내 뒤엉겨 봄의 새싹을 만들어 내는 생명의 이파리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희생으로 점철된 고단한 낙엽의 일생을 마감하며 마땅히 겨울잠 청할 곳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는 도시라는 몰인정한 생태계가 고작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암나무를 베어 버리는 인정머리란 게 도대체 이 가을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똥냄새가 싫다는 이 도시를 포기해야 할까보다. 은행잎으로 상징되는 가을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 * (스파시바, 시베리아에서 인용)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