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0-16 17:18
조회
2417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체가 뭐냐?


 흔히 ‘정체가 뭐냐’,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등의 말을 하거나 듣곤 한다. 정체성은 상당 기간 일관되게 유지된다고 간주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성질을 의미한다. 자기를 자기되게 해주는,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어떤 본질적 특성을 타자와 지속적으로 공유하며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독일에서 나치의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온 심리학자 에릭슨(Erik H. Erikson)이 자신의 뿌리를 고민하고 학문화하면서 학계에 알려진 용어이다. 영어 ‘아이덴티티’는 우리말로 정체성과 동일성이라는 뜻을 모두 가졌다. 문제는 정체성의 추구가 지속적 동일성으로 이해되고, 동일성은 차이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가령 미국 백인의 정체성은 흑인과는 구분되는 백인만의 지속적 동일성으로 인식되면서 흑인을 거부해왔고, 남성의 정체성은 자신을 여성과 분리시키며 여성을 차별해왔다. 흑인을 배제하며 백인의 정체성을 확인해왔고, 여성을 차별하며 남성의 정체성을 확보해온 것이다.


 비슷하게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및 아시아인을 차별하며 일본적 정체성을 확인해왔다. 타자를 배제하며 정체성의 이름으로 동일성을 추구해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차이’를 ‘틀림’으로 규정하여 ‘차별’하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척하거나 주변부로 몰아내는 것이다.


혐오의 발생


 왜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가. 동일성 밖에 있는 것들이 자기정체성을 오염 또는 훼손시킬 수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마사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에 의하면, 자신이 오염될 것이라는 생각이 ‘혐오’라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오염시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간주되는 것들을 거부하는 감정이 혐오이다. 혐오는 타자와의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타자를 경계선 밖으로 몰아낸다. 오염물을 경계 밖으로 밀어내야 자신의 순수함이 보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스바움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혐오하게 되는 근간에는 자신의 근본적 유한성이 놓여있다. 혐오의 감정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모습을 자신의 내면에서도 보되, 그것을 감추면서 발생한다: “혐오는 인간의 유년기에 경험하는 무기력함과 이러한 무기력함이 안겨주는 수치심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혐오와 수치심』, 205쪽)



사진 출처 - 서울신문


혐오와 분노의 차이


 혐오는 ‘분노’와는 달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개선하거나 사회적 선의 잠재성을 키우는 데 공헌하지 못한다. “어떠한 나쁜 행위에 대한 분노는 범죄자를 회복시키려는 소망이나 가해자의 인권에 대한 존중과 양립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혐오는 오염에 대한 사고가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사라져 버리길 원한다.”(199쪽) 분노가 그 대상의 성장과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혐오는 그저 삭제시키려 들뿐이다.


 가령 일본의 아시아 차별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기혐오의 표현이기도 하다. 스스로 아시아를 벗어나려는 행위 속에 아시아에 갇혀 있는 선천적 운명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아시아를 주변화하면서 유럽의 일원이 되려던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 속에 자신에 대한 혐오가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너스바움은 말한다: “역사 속에서 지배 집단은 자신이 지닌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끼게 하는 집단이나 사람에게 혐오를 드러냄으로써 이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해 왔다.”(37쪽) 그런 식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에 강한 경계선을 그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유한함, 내적 더러움에 대한 무의식적 고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여성 및 동성애 혐오


 나아가 “혐오를 느끼는 사람은 그 대상에게 더 이상 자신이 속한 공동체 또는 세계의 구성원이라고 보기 어려운 속성, 즉 일종의 외래종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305쪽) 혐오의 대상을 인간과 동물의 중간 지점 즈음에 위치시키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나치’를 인류학적으로 특수한 별종으로 보고, 나치에 의한 만행을 이 별종이 저지른 특별한 행위라고 봄으로써 자신에게서는 차지와 같은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도 비슷하다. 어떤 대상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을 그들과 분리시키면서 자신도 편안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혐오는 여성의 몸이다. 너스바움에 의하면, 똥, 오줌, 침 등 몸에서 나온 분비물을 혐오하는 경향은 남성의,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정액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그 정액을 받아들이는 여성에 대한 혐오로 연결된다고 한다. 게다가 출산을 하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동물적 삶과 더 가깝고 더 연속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성은 여성을 혐오하면서 자신이 동물성에서 멀어지고자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남성의 혐오는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여성의 혐오에 비해 강력하다. 남성의 몸에서 나온 혐오스러운 정액이 남성의 몸 안에서 배설물과 함께 혼합된다는 생각이 혐오자의 내면에 가장 혐오스럽게 자리 잡는다. 이러한 혐오를 여성이나 게이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들을 동물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은 동물성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소수자 차별과 희생양


 나아가 이러한 혐오에 공감하는 이들, 즉 ‘공범자’가 많아지면, 공범들의 힘에 의지해 더 자신 있게 자기 밖의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어떤 집단 안에서 문제가 될 즈음, 이 집단적 혐오의 대상을 해소시키기 위해 인류가 취해온 방식이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에 의하면, 희생양은 폭력의 방향을 하나의 대상으로 돌려 공동체 전체를 상호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문화적 장치다. 그는 말한다: “희생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가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19쪽)


 이 때 희생물로는 대체로 희생제의를 찬성하는 세력에 대해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선택된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포로, 노예, 파르마코스처럼 사회에서 배제됐거나 중심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주변 인물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류가 아니라서 주류만큼 행동하거나 주류에게 복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인 것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이민족, 특히 소수민족을 배척하고, 자기 종교를 내세워 타종교를 배타하는 것도 크게 보면 그들은 복수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근거한다. 이 자신감 안에는 전술했던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 문제가 놓여있다. 경직된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이 집단, 공동체의 이름으로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며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혐오가 얼마나 횡행하느냐에 사회적 도덕의 척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혐오의 양면성


 혐오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한 감정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그다지 이원론적이지 않다. 시체 혹은 시신을 혐오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현상으로서의 종교도 외부 사물이나 사건과 구분되는 순수한 현상이 아니다. 종교인은 종교인이자 사회인이고, 정치적 주체이자 대상이며, 자본을 비판하며 자본을 추구한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살생과 죽임을 불편해하면서도 살생의 결과인 고기를 먹는다. “우리가 혐오를 느끼지 않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피부와 머리를 잘라 내고 작은 조각으로 썰어서 그것의 동물적 기원을 위장하기 때문이다.”(170쪽)


 이런 식으로 인간은 누구든 복합적이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자 당대의 문화를 공유하는 혼합적 존재이다. 종교적 정체성은 물론 자기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자기 스스로 주장하는 것만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 역시 타자에게 동의를 받을 때 확립된다.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을 뿐더러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인정하면, 폭력성을 혐오하기보다는 폭력에 분노하며 폭력을 줄이는 길에 나서게 된다. 혐오와 폭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허접하고 씁쓸한 시위


 이러한 내용에 무지한 채, 성평등이 법제화되고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면 학교에서 항문성교를 가르칠 것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종교인(주로 개신교인)들을 보면서, 자신의 폭력적 내면을 드러내는 줄도 모르고 혐오성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이들을 보면서, 사랑을 그저 성교로만 생각하는 이들의 천박한 용감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연실색할 정도다. 신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논리라는 게 어찌 그리 반인간적이고 폭력적일까.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읽은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은 각종 혐오의 근거와 논리 등에 대해 일부나마 찬찬히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