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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4-24 18:40
조회
1948
-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 30년 전 : 엉뚱한 호기심에
 30년 전 대학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디딜 즈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요즘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 주변은, 산정에 낀 운무처럼 늘 매캐한 최루탄 가스로 그윽할(?) 때가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경찰과 전경이 수시로 학교 주변을 에워싸고 불심검문을 해댔다. 나 같이 선량한(!) 학생들도 괜히 주눅이 들어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기분 나쁘게 떠오른다. 집회가 있는 날은 학교 건물 곳곳이 가려질 정도로 근처 집이고 사람이고 최루탄을 뒤집어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대입전형에서 가고 싶은 대학을 먼저 정하고 시험을 치르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처음 도입되던 때라, 내가 ‘대학’과 ‘과’를 정하고부터 집안은 물론 주위 어른들의 염려의 말을 적잖이 들어야 했다. ‘그 학교는 어떠니’, ‘그 과는 어떻다’느니, ‘절대 데모하는 근처에도 가지 마라’…. 다녀본 사람들보다 ‘빠싹하다’는 투였다. 그런 말들로 이미 단련된 나였기에 주위의 ‘꼬임’(!)에도 눈과 귀 모두 닫고 도서관과 하숙집만을 오갔다.


 아니, 그런데…. 그런 내 눈에 척 들어와 박힌 책 제목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이란 부제를 눈여겨보았더라면 내 인생항로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 출처- yes24



 ‘앞으로 무얼 하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걸까’
한창 고민하던 때여서였을까, 기어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의 책을 펴들고 말았다. 그 한 권의 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알려진 대로 블라디미르 레닌(본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때는 이런 류의 책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야 했다. 동아리방이나 학생회 사무실에 ‘짱박아’ 두고 읽어야 동티가 나지 않을 법한 책이었다.


 놀랍게도 20세기에 막 들어서던 무렵인 1902년 세상에 나온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시 국제 노동운동에 횡행하고 있던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학습’하며 이른바 ‘무지가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새겼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 2018년, 오늘을 살며 : 선택하는 삶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우연’히 다가오는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상상도 하지 못할 분수령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많은 이들이 함께 경험한 ‘촛불집회’였다.
4․19혁명, 5․18광주 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 우리 역사 중요한 고비마다 ‘필연’은 ‘우연’의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차가운 광장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던 촛불을 경험하며 우리는 지금 또 한 번의 분수령을 맞고 있다.  그 분수령 앞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 깨어져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로 무거운 돌을 던져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살얼음판 같은 역사 현장에 돌을 던져대고 있음에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게 돌인지 아닌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정권 창출이나 권력 쟁취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른바 ‘공신’(功臣)의 모습이나 예의 최순실과 같은 ‘고마운 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이기에 예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말을 떠올리게 됐던 모양이다.


 이 시대는 레닌이 살았던 시대보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몇 곱절 확장돼 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 더 중요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의 ‘우연’적 선택에 따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10년 전으로, 아니면 더 과거로 미끄러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안희정, 김기식….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공신’(功臣)들의 궤도이탈에서 그 퇴행적 증후를 본다. 중차대한 역사의 고비 한가운데 서있다는 인식 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성취’에 취해 역사 자체를 되돌려버린 뼈아픈 사례를 무수히 보아온 우리들이다.


 ‘역사’나 ‘사람’이 아니라 ‘개인’에 갇힐 때, 매몰될 때 그 후과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이명박근혜’ 9년의 역사는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지난 9년의 역사는 30년 전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제대로’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역사적’ 개인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