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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법대로 하다가 잃어버리다(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0-10 16:08
조회
1096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과 믿음


 지금부터 약 2천 5백 년 전,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이 될 수 있도록 터를 닦았던 사람이 있었다. 상앙(商鞅)이다. 그는 진 효공의 신임을 바탕으로 재상에 올라 10년 넘게 집권하며 법치(法治)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법이 뭔지도 몰랐다. 상앙은 5미터 정도 되는 나무를 남대문에 세우고 말하였다. “이 나무를 동대문에 옮겨놓는 사람에게는 1백만 원을 주겠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백만 원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속는 셈치고 옮겨놓자, 그는 5백만 원을 주었다.
 상앙의 법이 시행된 뒤, 진나라 백성들은 처음에는 만족스러워했다.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고, 산에는 도적이 없었다. 집집마다 풍족하였고, 사람들의 마음은 넉넉하였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서 용감히 싸웠고, 사사로운 싸움은 조심하였다. 도시든 시골이든 편안했다. 법을 어기면 코를 베고, 죽이고, 이마에 죄를 새겼기 때문이다.


비극의 남자


 10년이 지나며 차츰 법이 법을 낳고, 인심은 각박해졌다. 상앙이 외출할 때는 무장한 병사들이 경호차를 타고 따라야했다. 천하장사 같은 사람들이 경호를 맡았다. 그러다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주변에서 상앙이 반란을 꾀한다며 밀고하였고 새로 즉위한 혜문왕은 상앙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앙은 달아나 서안(西安) 함곡관 근처 호텔에 투숙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텔 지배인은 투숙을 거부했다. “상앙의 법에 의하면 여행증이 없는 손님을 묵게 하면 관련법에 의해 처벌 받습니다.”
 상앙은 법을 만든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상앙은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내지는 신세가 되었고, 수레에 몸을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받아 죽었다.


공자(孔子)의 걱정


 사마천(司馬遷)이 길지 않게 기록한 상앙의 일화는 각박한 법률가의 최후를 인용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런데 사마천의 말을 빌지 않아도 상앙으로부터 근 2백 년 전에 이미 공자가 법치(法治)의 함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을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사람들은 처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덕성으로 이끌고 예의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반듯해질 것이다.”
 공자의 방점은 부끄러움에 놓여있다. 외부의 강제가 거꾸로 자성의 계기를 잃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를 알고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훈련이 된 인격의 확보가 먼저라는 말이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응당 객관적 기준,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바로 반론이 들어올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여기서 유가(儒家) 역시 한 번도 덕성과 법치를 분리한 적은 없다는 점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사진 출처 - freepik


내가 겪고 있는 소송


 3년 전 고속도로에서 후방 추돌을 당하여 폐차해야 했다. M보험사에서 보상 문제로 전화가 왔다. 매매가 1천 3백만 원, 보험가 1천만 원인 차에 대한 보상금으로 4백만 원을 제시하였다. 내가 웃으며 “4백만 원을 내가 줄 테니, 그런 차를 사와 보시구려!” 했더니, 보험사 직원은 5백만 원으로 올렸다. 난 이 사람들이 장난하는구나, 느꼈다.
 사정을 들은 법률가 친구가 분노했다. 그는 소송을 해서 합당한 판결을 받자고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어 줄 친구라도 있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은 보험사에서 저렇게 버티면 결국 손해를 본 채 합의하고 말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단다. 보험사는 그렇게 먹고 산단다. 이런 게 그들의 일이고, 관행이란다.
 소송이 들어간 뒤 M보험사의 다른 직원, 우리 학교를 담당하는 직원이 찾아왔다. 1천만 원을 채워드릴 테니 그냥 합의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는 반대했다. 바로 그 돈이 필요한 게 아니면 소송해서 판결을 받아 관행을 바로 잡자고. 나 또한 괘씸해서 그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M보험사는 처음에 말로 해결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보상해야 할 것이다. 법률가인 내 친구의 판단에 따르면 말이다.


이해는 가는데


 나는 원래 공자의 말에 통찰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또한 일상의 경험에서 ‘법대로’는 곧 인간관계의 종말임을 잘 알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이웃과 싸울 때 “법대로 해!” 소리가 나오는 순간이 파탄의 출발 아니던가?
 하지만 보험사의 관행화된 횡포를 바로잡겠다며 소송을 맡고나선 친구의 입장 역시 이해한다. 친구에게는 판결이 정의다. 그는 M보험사를 두고 바보란다. 줄 거 주면 되는데, 비용만 늘린다고. 친구는 판결을 받아놔야 그런 횡포가 줄어든다고 사명감에 차 있다.
 어리석음. 이 소송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M보험사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보험사의 횡포를 막을 판례를 남기겠다는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야 남의 일처럼 놔두고 있으니 어리석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어리석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법 없이 산다는 것


 요즘 우리는 법 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다. 기소권, 수사권, 구속영장, 구속적부심, 소환, 기소편의주의, 기소독점주의, 자본~법, 뭔 법, 뭔 법. 전 국민의 법률가화(化) 상황에 돌입한 느낌이다.
 실제로 텔레비전 토론회를 볼라치면 패널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변호사다. 현재 직업이 뭐든 법 전문가라고 자칭하면서 시시콜콜 따지고 있다. 이건 구속사유가 되느니 안 되느니, 증거가 되느니 안 되느니.
 국회의원들은 지들 일을 국회에서 해결 못해서 결국 서로 고발하고, 주택 수백 채를 가진 갭 투기꾼은 법적으로 문제없으니 고소하려면 하라고 하고, 한 학생 대입자료 조사를 위해 검사 수십 명이 들러붙고 등등. 이루 셀 수 없는 만성화된 법에의 호소, 뒤따르는 법의 능멸이다.
 계속 이렇게 법으로만 풀어가려 해도 괜찮을까? 나는 불안하다. 단,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식상한 말에서 이 법치 과잉의 사회를 탈출할 희망을 본다. 법 없이 산다는 것은 알아서 한다는 것이고, 잘못해도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법 없이, 혹은 최소한의 법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이런 삶이 법치를 가장한 어리석음을 넘어설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연대와 우정보다 단절과 소외를 낳는 외마디, “법대로 해!” 그 척박함 때문에라도, 법 없이 산다 함은 이 사회와 문명에 대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 자체이다. 감히 예언한다. 법의 능멸을 극복하는 이는 법기술자가 아니라,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이 글이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올라간 뒤, 칼럼의 우려를 증명하듯이 두 가지 사태가 또 벌어졌다. 유시민 이사장은 알릴레오에서 김경록 PB와의 인터뷰를 발표했고, 거기서 KBS 보도의 왜곡을 지적했다. 지적이 타당한지 어떤지는 일단 놔두자. KBS 사회부장이 보직을 사퇴할 수도, 경영진이 무슨 조치를 취할 수도, 기자들이 의견을 낼 수도 있다. 여기서 예의 빠지지 않은 말이, 가장 먼저 나온 말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KBS가 언론으로서, 하나의 거대 공영조직으로서 취할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법적 대응’인가?


 또 하나. 한겨레21에서 윤석렬 검찰총장이 김학의가 성접대를 받았다던 윤중천 소유의 별장에서 접대를 받았다는 기사를 냈다. 이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대검찰청도 대뜸 ‘법적 대응’을 꺼냈고, 당사자 윤석렬은 고소하겠다고 한다. 더구나 검찰은 수사, 조사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해명,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고소, 고발을 해야 할까? ‘법적 대응’이 이 사회의 무조건반사가 된 듯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