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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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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부끄러움(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5-20 17:07
조회
854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운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20년 넘게 방송되었던 <개그콘서트>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된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평소 TV를 잘 보지 않지만 그나마 코미디 프로그램만큼은 자주 챙겨 보았습니다. 혹시, 없는 주변머리가 좀 생길까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선이 끝나자마자 <개콘>이 폐지된다고 하니 섭섭하고, 왠지 공교롭기까지 합니다. 수년 동안 현실 정치인들과 그 주변의 사건들이 너무 우스워서 <개콘> 시청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KBS


 제가 아직도 떠올리곤 하는 오래된 코미디의 한 장면은 부끄러운 기억과 겹쳐 있습니다. 전두환 군부정권 당시의 일입니다.


 “어이!”
 지하철 출구로 나오자마자 낯선 이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저를 불러 세웁니다.
 “신분증!”
 저는 신분증을 보여줍니다.
 “가방 열어 봐!”
 저는 가방을 열어 보입니다. 그는 제 가방 속을 이리저리 휘젓습니다. 저는 감히 그에게 누구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등등한 서슬에 잔뜩 겁을 먹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끽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도 못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보았던 어느 TV 코미디의 한 장면은 저에게 코미디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얼추 이렇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바보 분장을 한 심형래 씨가 골목 한쪽에서 거들먹거리며 특유의 어투로 행인을 불러 세웁니다.


 심형래: 어이!
 행인 1: 네?
 심형래: 주민등록증 내놔 봐!
 행인 1: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여... 여기요.
 심형래: (주민등록증을 거꾸로 받아 들고) 너, 왜 사진을 거꾸로 찍었나?
 행인 1: (겁에 질려서) 거... 거꾸로 보고 계시잖아요.
 심형래: (주민등록증을 바로 세우며) 이거 당신 거 맞어?
 행인 1: 예.
 심형래: 통과! (뒷사람을 가리키며) 다음 너, 주민등록증 내놔 봐!
 행인 2: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여... 여기요.
 심형래: (주민등록증을 뒤집어 들고) 이건 왜 사진이 없나?
 행인 2: 뒤집어 보면 있는데요.
 심형래: (뒤집어 보며) 그렇군, 가 봐!
 행인 2: (조심스럽게) 그...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심형래: (바보처럼 웃으며) 내가 어제 여기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거들랑요.


 광주항쟁 40년. 군복 차림으로 무릎이 꿇려지고 뒤로 포박당한 채, 인상을 찌푸린 전두환 조형물이 트럭에 실려 연희동으로 가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전두환 조형물을 볼수록 우습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부끄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뜬금없이 여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한 21대 국회는 어떤 모양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개콘>은 완전 폐지되는 것인지, 다른 형식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재탄생되는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